파도!-3
"그냥 산책하러 나왔어."
임기응변으로 한 대답이었다.
"그럼 같이 하자."
파도가 말했다. 마지못해 끄덕였고, 할머니가 있는 바닷가를 피해 빙 돌아 골목으로 걸어갔다.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사람처럼 자꾸만 땀이 흘렀다. 그 모습이 의아했는지, 파도도 내게 몇 번 말을 걸다가 말았다. 그렇게 말없이 몇 분 동안 우린 걸었다. 긴장이 좀 풀렸고, 그제야 나는 다른 것들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여름밤 적적하게 울리는 귀뚜라미 소리, 전류가 얼마 남지 않은 가로등이 힘에 겨워 깜박이는 소리, 저 멀리 바다에서 조그맣게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
얼마 되지 않는 그 몇 분의 시간이 나는 그저 좋았다. 세상 모두가 우리를 위해서 고요를 유지해 주고, 최소한의 소리만을 내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랬다. 마치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처럼 영원하길 진심으로 바랬다. 그리고, 적막을 깨는 파도의 한 마디.
"나, 바다 보고 싶어."
거절하고 싶었지만, 우주를 담은 것 같은 파도의 깊은 눈망울을 본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린 바다로 향했다.
자꾸만 신발 틈으로 들어오는 모래알들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이 모래사장에서의 할머니의 유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지만, 그때 당시에 나는 할머니의 볼품없는 옷차림과 폭죽 장사라는 직업이 부끄러웠다. 왜인지 모르게 그 사실을 들키면 파도와 멀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필살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가, 후에는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여 그만두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걷던 중, 불빛 하나가 피어올랐다. 불빛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용맹이 뛰어들어가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 새카만 곳을 삽시간에 밝혔다. 별조각처럼 흩어지는 불빛들을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름다운 순간만을 남기고 그렇게. 나는 아직까지도 그때의 순간을 믿는다.
"나는 아빠가 없어. 엄마랑 혼자 사는데, 정신이 많이 아프셔. 언젠가부터 이상한 신 같은 걸 믿더니, 결국 그렇게 되셨어."
폭죽이 우리의 '대화'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일까, 파도는 쉽사리 할 수 없는 말들을 조금씩 시작했다. 어릴 적 아빠에게 학대당했던 이야기, 시도 때도 없이 엄마에게 폭언을 당한다는 이야기 등, 듣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야기들. 이런 말들을 내게 허울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에 의문도 들었지만,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