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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푸름 Nov 14. 2019

지우고 싶은 부끄러움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복이 한참 지겨워 지던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에 가서 영어 단어를 외우지 못해 혼날 걱정으로 가득하다. 터벅터벅 걸어 도어락을 열고 집에 들어간다.

“할매, 나 왔어.”

“푸름이 왔냐?”     

베란다, 주방 그 어딘가에서 할머니의 목소리만 들린다. 할머니는 늘 현관이 아닌, 어딘가에서 ‘왔냐’라고 반길 뿐. 묵묵히 빨래를 널거나 바닥을 닦고 계신다.     

할머니가 어디있는지 확인한 후, 나는 가방을 소파에 던져두고, 교복 자켓은 뒤집어서 식탁 의자에 걸어둔다.


우리 집은 좋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산은 신도시 재개발이 시작됐다. 할머니는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고, 집값이 오르면 집을 팔아 대출금을 갚고 돈을 벌었다. 이른바 ‘시세차익’을 노린 재테크였다. 나는 할머니의 수완 덕분에 좋은 아파트에도 살 수 있었다. 재개발이 되지 않은 동네와 다르게 높게 올라간 아파트로 들어갈 때면 뭐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리고 나의 자격지심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안 계신다고 날 무시하진 않겠지? 아버지는 없어도 난 이렇게 잘 산다고.’     

 

 빛 좋은 개살구의 빛깔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할머니의 기력이 쇠하면서 경제 상황은 위기를 맞았다. 아파트를 살 때 빌렸던 대출금 이자도 갚기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안산에는 우리 아파트보다 더 좋은 브랜드와 고급형 아파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빚을 내서 샀던 우리 아파트 매매가는 내려갔다. 우리 집은 본전도 찾기 어려워 졌고, 할머니는 아파트를 팔기로 했다. 우리는 대출금을 갚고 옆 동네 빌라로 이사 갔다.     

지금 생각하면 아파트에 사는 게 얼마나 감지덕지한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요새는 작은 베란다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건만.     

경제는 더 안 좋아졌다. 나의 대학등록금은 가계에 큰 부담이었다. 학자금 대출을 껴서 다행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돈을 들인 데 비해 대학교 졸업 후 취직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내가 취직하지 못하는 것에 할머니는 채근하지 않으셨다. 그 덕분에 나는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늦더라도 나의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 가장 중요했던 건 급여도, 복지도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일 년 뒤, 나는 마침내 취직에 성공했다. 내가 원하는 곳이었다. 월급은 100만원. 나는 그것에 무척 감사하며 다녔다. 꿈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돈이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내가 그 돈에 만족하며 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건, 내가 혼자 살게 되고, 살림을 맡을 때부터였다.     

20평 아파트 월세를 감당하려면 한 달에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 한 달에 식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가계부를 살펴보며 나의 형편을 알게 됐다. ‘한 달을 살려면 이 정도는 들어가야 하는구나.’ 나는 먹고 싶은 것들도 아꼈다. 빌라로 이사도 가야했다. 그럴 때면 그동안 철없이 썼던 돈들이 생각났다.     


우리 세 남매를 위해 엄마는 서울에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어서 보내줬을까. 우리 세 남매를 키우기 위해 할머니는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맸을까. 내가 대학교 졸업 후에 평균 월급 수준으로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돈을 많이 버는 직종으로 취업을 준비해 취직했다면 가계 살림에 도움이 됐을 텐데. 후회는 자비 없이 밀려왔다.     


엄마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안산에 작은 빌라에 살고 있다. 가끔은 그 시절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가 그리워 찾아갈 때가 있다. 아파트의 벽 색깔이 색이 바랜 듯하다. 그 색은 꼭 우리 가족의 모습 같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즐겁고 풍요롭던 시절이 스쳐가는 건 왜일까. 지금과 상황이 너무 달라서겠지. 저 색이 모두 나 때문인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얼마 전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보며, 나의 부끄러운 기억을 대입시켜봤다. 영화의 주인공 조엘은 옛 연인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병원을 찾아간다. 기억을 삭제하는 도중,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이 소중한 추억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주인공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둘은 기억을 지우는 의사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오래된 기억 속으로 도망친다.      


나도 나의 철없던 과거를 지우고 싶다. 그 중 경제관념 없고 성실히 공부 하지 않았던 과거를 가장 지우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을 지우려 하지 않기로 했다. 마주하기 싫지만, 그 곳엔 언제나 할머니가 있다. 내가 할머니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는 모습, 비싼 메이커 신발을 사달라고 하는 모습, 형편이 어떤지도 모르고 패딩을 사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 나는 그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거기엔 희미하게 할머니가 남아있다.

‘그거 사서 뭐덜라고’

‘그래 그거 하나 사라. 겨울 나려면 사야지.’

‘공부 힘들제?’

나에게 너무 소중한 할머니라,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하기를 했다. 만약 나의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다, 할머니의 작은 미소마저 사라지면 안 되니까. 나를 미워할지언정, 할머니의 모습은 지우면 안 되니까.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새로운 경제관념과 돈의 가치를 세우려 한다. 그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돈은 우리 생에서 중요하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 중요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 내게 돈이 풍족하지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물론 사치도 줄였다. 절제와 절약의 즐거움도 알았다.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보인다. 할머니를 마주하기 그리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자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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