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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푸름 Nov 16. 2019

간병은 분담

간병은 몰아주기가 아닙니다. 분담해야 합니다.

“할머니 김치 좀 잘 갖다드렸어?”

막내 삼촌은 내 의무인 것 마냥 다그치며 말한다.

“네. 갖다 드렸어요.”

“사이다랑 과일도 사다드렸어?”

더 이상 물어보면 짜증이 날 것 같다.

“사다 드렸어요.”


물론 내가 맡아서 간병을 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할머니 자식들이 부양해야 하는 의무는 왜 0으로 수렴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흔한 말로 아들은 제사를, 며느리는 간병을 해 줘야 한다고 한다. 공평하게 역할을 나눈 것 같은 이 말은 큰 모순이 있다. 제사는 아들이 해야 한다고 했지만, 제사상에 올라갈 음식 준비는 며느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며느리의 몫이라는 간병은 또 어떤가. 일 년에 한두 번하는 제사를 하는 아들이 일 년에 한두 번 쉬는 것조차 힘든 간병의 무게를 알까.      


간병은 모두의 몫이다. 분담해서 짊어져도 처절하고 힘든 일이다. 만약 깔때기처럼 많은 사람들의 몫을 한 사람이 받아낸다면 과부하가 걸리기 마련이다.      


간병은 컴퓨터의 원리와 비슷해 보인다. 컴퓨터는 이진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1을 눌렀을 때 1이 나오고, 0을 눌렀을 때 0이 나와야 한다. 1을 눌렀는데 0이 나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찾기 위해 수리를 하거나 업데이트를 한다. 간병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간병인은 환자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한 일이지만, 그게 정작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되레 환자가 싫다고 할 때가 있다, 간병인은 감정이 상하게 된다. 컴퓨터처럼 업데이트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컴퓨터가 오류가 뜨면 업데이트나 재부팅 해주면 된다. 간병인도 휴식이나,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을 메꿔줄 인력이나 손이 없다면 어렵다. 업데이트 알람이 뜨지만 무시하고 급한일을 처리한다. 환자를 계속 간병한다. 자신의 휴식은 계속 미루게 된다. 간병인의 이성은 환자를 정성껏 돌봐주고 싶지만, 심리적으로 지친 간병인은 신경질이 많아진다.      


가족들은 환자가 걱정되는 마음에 의견을 낸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한 번씩 내는 거지만, 간병인 입장에선 요구사항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여러 명이다. 환자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일일이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할 여력이 없다. 세세한 일은 채무감으로 변해 자신을 옭아맨다. 결국 폭발하고야 만다. 간병인의 부정적인 기운은 환자에게도 전해지게 된다.      


가족들은 간병인에 대한 배려를 해야 한다. 환자의 배려는 두 번째다. 간병인은 늘 환자를 1순위로 두고 있으니 그래도 된다. 환자도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자책감으로 변질된다. 간병인이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정신적 고통도 더해진다.      


돌봄은 고령화 시대 속 우리의 과제다. 자식을 낳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있을지 걱정한다. 부모자식이 아니고선 고된 간병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실은 부모자식 사이에도 감당하기 힘들다. 뉴스에서 20년이 넘는 간병에 지쳐 어머니가 자식의 산소호흡기를 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하나’ 라는 생각보다 ‘오죽 힘들었으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간병은 사랑으로만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려 간병인의 희생을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며느리 혹은 딸에게만 돌봄의 의무를 맡기지 않길 바란다. 또 의무를 준다고 해서 돌봄 노동에서 방관자가 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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