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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푸름 Nov 16. 2019

화장터 가는 길

손녀지만 영정사진은 들고 싶어

장례식 절차에서 여자는 한없이 보잘 것 없어진다. 할머니에게 삼베옷을 입히는 것도 아들인 삼촌들만 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관을 들 수 있는 영광도 남자들에게만 있었다. 장례지도사는 딸은 죄인이라 절을 4번하라고 했다. 전통과 예법은 여자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편리하구나 싶었다. 맘같아선 당장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시대착오적이고 시대를 역행하는 말이라고 따지고 싶지만, 할머니의 장례식을 요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경건한 ‘애도’라는 바리게이트는 나를 가로막았다. 그런 바리게이트 때문에 제사와 장례식 속 성차별은 사라지지 않겠지.


결국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십년이 넘도록 연락 한통 하지 않던 우리 집안 장손의 손에 쥐어졌다. 할머니 마지막 숨소리 한번 듣지 않은 사람이 영정사진을 드는 영예를 안는구나. 전통이란 게 이런 거라니, 참 우스웠다.


사람들은 할머니의 관을 영구차에 조심스레 넣었다. 어두운 영구차에 할머니는 홀로 누워계셨다. 그 쓸쓸한 관을 보니 심장이 입을 통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내 손에 있던 할머니의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눈물이 흘렀다. 소리를 치고 싶지만 내 몸 어딘가에서 목소리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하고 싶은 모든 말은 눈물이 되어 나왔다.


셋째 삼촌은 말했다.

“영구차에는 손자들이 타.”

영구차는 앞에 1자리, 뒤에 3자리가 있었다. 앞에는 영정사진을 든 장손이 탔고, 뒷자리에는 친척 남동생 두 명이 탔다. 한 자리가 남았지만, 나는 탈 수 없었다. 손'자'가 아닌 손'녀'. 그 뒤에 글자 하나 차이 때문에.


내가 없으면 잠도 잘 못자는 우리 할머니. 나를 꼭 껴안고 자던 우리 할매, 나의 소울메이트나 다름 없던 당신. '할머니 화장터 가는 길이 무서우면 어떡하지.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을까.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을까. 내가 같이 가 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나의 온 몸을 움켜쥐었다. 설령 숨이 다한 할머니의 몸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할머니와 가까이 할 수 있는 순간이 지금 뿐이라는 생각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하나 둘 화장터로 가는 버스에 탔다. 나는 멍하니 서서 할머니가 있는 영구차를 바라봤다.


나는 성대를 쥐어짜내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 나 할머니랑…같이 갈래요…”

말을 잇지 못하고 바보같이 울어버렸다.

“…”

삼촌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한번 더 목젖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말했다.

“할머니랑 같이 가게 해 주세요…”     

말을 하는 동안 제발 흐르지 말아달라고 눈물에게 애원했다. 그렇게 소리칠수록 눈물은 내 마음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우리의 이별처럼.


가족들은 화장터로 가는 버스 창문으로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떨궜다.

“그래. 푸름아, 그래. 얼른 타라.”

셋째 삼촌은 내 등을 토닥였다.      


삼베옷을 입히는 게 뭐라고, 영정사진을 드는 게 뭐라고, 관을 드는 일 못 드는 게 뭐가 대수냐고 할 수 있다. 근데 나는 그게 대수로웠다. 할머니를 안지 못하는 게 뭐가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만질 수 없는 게 뭐가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큼 내게 대수로운 일은 단언컨대 없다.


오히려 관이나 영정사진을 들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면, 늘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하던 여자에게 왜 주지 않냐고 말이다.      


나는 할머니와 가장 가까웠고, 할머니에 대해 가족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싫어하는 자신의 사진이 뭔지. 누구와 함께 화장터에 가고 싶어 하는 지도. 나는 선택하고 싶었다. 할머니의 삼베옷을 입힐 때도, 영정사진을 정할 때도 개입이 아니라 주관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례식에서 여자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전통이라는 틀은 여자에게 중요한 역할은 맡기지 않았다.


할머니와 누구보다 깊은 정을 나눈 사람도, 옆에서 간병을 한 사람도 모두 나였지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모든 고생과 위로는 아들들이 받았다.


나는 상처가 되는 예법은 수정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고인이 가는 마지막 길을 망치는 게 과연 무엇일까. 나는 할머니의 마음을 확신한다. 누구보다 아끼던, 사랑하던 손녀와 함께하길 바랐다는 건, 굳이 할머니의 목소리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할머니의 제사 때면 나는 기어코 술을 따른다. 여자라고 절을 두번 하지도 않는다. 분명 할머니도 이해해주실 거다. 오히려 반기시지 않을까.

"푸름아, 넌 왜 술 안 따르냐?" 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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