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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푸름 Apr 12. 2020

우리 그렇게 합시다

잘 익은 노을 빛이

세 평 남짓 나의 방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오리잠에 잠이 드니

우리 할머니가

내 침대에 찾아왔다


트레이드마크인

브로콜리를 꼭 닮은

백발 성성한 파마머리


여전히 사랑스럽구나


장을 보고 집에 온 사람처럼

내 옆에 편안하게 앉아있다


곧 떠나야 할 채비도 없이

내 옆에 앉아있다


어디 안 갈 것처럼

평온하게 앉아있다


할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 떠날까

조급하지 않게

불안하지 않게


얼마 만일까

언제 떠날까 걱정 없는

이 느낌


누구에게 절을 하면

당신과 함께하는 이 시간을 늘려줄까


오후의 빛살이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현실의 오후와 꿈의 경계가 사라지고

눈 앞에 사랑이

허망한 상상이 아니길 바라본다


덧없는 그리움과

반가운 욕심에

오후와 꿈은 두 개로 쪼개지고

창문에 검은 밤바람이 들어온다


혼자 남겨진 서러움에

꿈에도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

손녀딸의 모진 말 들었나


내 한 걸음이

당신 스무 걸음


갈 길이

스무배는 될텐데


마음 고된 날

그리움을 쏟아내는

손녀딸이 마음 쓰여

길 잃으면 어쩌나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두고 온 손녀딸 걱정스러

그 좋은 곳 못 가면 어쩌나


여기서 내 눈물 보고 있으면

어쩌나


소매춤으로 눈물을 닦으며

얼른 가라고

손을 휘휘

휘휘 저어본다


난 괜찮으니

부디 발길 돌리지 않길

부디 걸음이 무겁지 않길


낡은 당신 무릎

가서 주물러 줄 수도 없으니


나중에 아주 먼 나중에

무딘 손으로 주물러 줄게


당신은 그곳으로 잘 당도하고

나는 그곳으로 잘 찾아가길

그렇게 기다리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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