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숨진 채 발견되다

무관용의 시대

by 임요세프

상식(常識, Common sense)은 정상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갖고 있거나, 갖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분별 능력을 통칭하는 용어다. 한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관, 기본 교양을 뜻한다.


그러니, 사회가 바뀌면 상식도 자연스럽게 바뀔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프랑스에서 어느 경찰관이 알제리계 청년을 향해 총을 발사한 사건으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행해져 온 프랑스 경찰조직의 인종차별적 법 집행 관행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프랑스는 어떤 개별 주체(개인, 단체)라도 자신의 신념이나 기호에 따라 타인을 억압하지 않고, 타인의 인종, 사상, 종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관용(寬容, tolerance, 똘레랑스)의 대표 국가로 알려져 있다. 최소한 엊그제까지는 그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한 경찰관의 치명적 실수,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한 소수 민족의 대규모 시위와 폭동, 청소년들의 SNS가 폭력을 부채질한다며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는 프랑스 대통령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불과 며칠 사이에, 관용의 대명사 프랑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동안 인종의 용광로가 너무 뜨거웠던가 보다.

프랑스는 1572년 파리에서 3,000명의 신교도가 구교도에게 학살당하는 등 피로 피 씻기를 반복한 종교 갈등을 겪었다. 이때의 교훈이 똘레랑스를 낳는 계기가 됐다. 희생과 헌신 끝에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프랑스의 관용 정신이 최근의 안타까운 사건으로 인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참 씁쓸한 현실이다.



상식의 전복(顚覆, 뒤집힘)은 미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 소수인종 우대 입학 제도로 인해 백인과 아시아계 지원자들이 오히려 역차별받고 있다며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연방 대법원이 위헌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학생은 인종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 판결의 취지였다. 피부색이 아닌, 도전, 기술, 배움과 같은 개인의 정체성이 헌법의 정신에 부합한다것이다.

보수성향의 대법관 수(6명)가 진보성향의 대법관 수(3명) 보다 더 많아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파장은 크다. 단지, 1심과 2심의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이 결과는 유색인종 학생들의 대학 입학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기업에서 인재 채용 시 인종을 고려하는 방식, 소수 민족의 노동 시장 진입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결정은 인종, 피부색 또는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는 미국 연방법의 취지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으로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60년 이상 유지되어 온 미국의 소수인종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에 대한 제동이기도 하다.


미국의 집권 세력인 민주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민주당은 인종 정의를 향한 미국의 행진에 거대한 장애물이 나타났다는 공식 의견을 냈다. 반면, 공화당 측에서는 법원이 인종 할당제와 인종차별에 대한 긴 실험이 끝났다며 결정을 환영했다.

한 사회가 오랫동안 바람직하다고 여겨 온 공정과 정의, 상식에 대한 가치, 사회적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뒤바뀐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오롯이 소수 9명에게만 부여된 권위, 강제적 결정 권한에 의해서 말이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에 있어 언제나 옳은 정의란 없다. 재판정 무게의 추는 언제든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정의와 상식의 변동가능성을 인지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강 건너 불구경할 만큼 우리나라 사정이 한가하지는 않다. 정권교체 후 1년, 그사이 세상의 기준점이 많이 바뀌었다. 이전 정부의 대북 정책은 한순간에 반국가 세력의 농단이 되어버렸고, NO JAPAN 정책도 BUY JAPAN으로 바뀌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가 180도 바뀌어 버리니, 상대방에 대한 관용을 운운하는 자는 회색분자(灰色分子)로 취급되기 일쑤다. 자칫하다간, 양쪽에서 비난받는다.

물론, 이런 고민을 토로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알아줄 사람은 없다. 일개 소시민에 불과한 나의 외침은, 그저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솔직히, 그다지 야속할 필요도 없다. 어떤 사회든, 어느 국가든 구성원의 수준에 걸맞은 시스템, 정권을 갖기 마련이고, 선택의 결과는 공동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기에, 세상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자기가 원하는 정권이 들어서기만을 바라며 5년을 허송세월하거나, 사사건건 반대만 하면서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보수와 진보 중 어느 정권이 나에게 유리하고, 나의 상식에 부합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타인(상대 세력)에 대한 관용이다. 사람들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사안별 갈등도 첨예하다 보니, 문제 해결을 위한 접점 혹은 타협점을 찾기가 어렵다. 파편화된 세상,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의 상식인 시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인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기성세대와 MZ세대, 일반인과 이반인(성소수자), 종교인과 비종교인, 부자와 빈자 등 세상이 온통 갈등투성이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깡 아니고서야 자기 생각, 가치관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 부담스럽다. 댓글과 대댓글, 욕설과 비난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블라인드는 차마 눈 뜨고 읽지 못할 수준이다. 아고라(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광장,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 민주주의의 상징)에 대한 기대는 저버리는 게 낫다. IP 추적이 불가능해지자, 익명성에 기댄 방구석 키보드 전사, 사이버 괴물들만 더욱 활개를 친다.


말로 하는 싸움만으로는 부족한지, 요즘은 현피(실제 오프라인에서 만나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도 유행이다. UFC에서 주관하는 막싸움(!)이 사람들의 아드레날린을 자극한다.


세계 최고의 기업가인 일론 머스크와 마크 저커버그 간 격투가 성사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고도의 사업전략, 마케팅 수단일 수도 있겠지만, 썩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물론,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도 아직 진행 중이다.




바야흐로, 갈등과 무관용의 시대다.


미국도(달러), 중국도(위안화), 일본도(엔화), 프랑스도(유로화), 러시아도(루블화), 그리고 대한민국도(원화) 꼭 옳은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어느 한 나라(화폐)가 상대적으로 제일 낫다고 결론 내리기도 쉽지 않다.


신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정답은 아닌 듯하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국도 없다는 국제 관계의 오랜 상식이 아직 유효하다는 점만 분명하다.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나의 모국에 대해서도 높은 점수를 매길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정답은 없지만, 접점은 어딘가 있는 듯한데, 위정자(爲政者)들이야말로 갈등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활약하고 있으니, 해결은 요원하다.


그러다 보니, 자꾸 나와 내 가족에만 집중하게 된다. 시야를 조금 넓혀 나의 친구, 동료, 선후배, 이웃을 보듬어야겠다는 생각마저 버겁다. 세상의 유력한 스피커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취향이 비슷한 사람하고만 만나고 교류하기를 추천한다. 타인의 말과 글, 폭력으로 상처받은 영혼들로 인해 정신건강의학과는 오늘도 만원이다.


오지랖 부리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아가지는 못할 듯하다. 욕을 먹고, 눈초리를 좀 받더라도, 나의 상식과 가치관을 끊임없이 꺼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하며 교정(敎政), 전복(顚覆) 해 나가야 한다.


이따금 협상과 토론을 통해 내 상식의 지평도 넓히고, 상대방을 이해시키거나 행동의 변화를 이끄는 등 깜냥껏 소명도 다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지금 미국, 프랑스, 우크라이나, 그리고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식 밖(!)의 일들에 대해서는 내 가치관, 상식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조심스럽다면, 자신의 의견을 은유적으로 피력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사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상식을 갖추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전지(全知)한 창조주(조물주) 혹은 인공지능(AI, CHAT-GPT)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당신과 나는 모두 전지(全知)적 시점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두서없이 내뱉는 말보다는, 정제된 글로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나와 생각, 의견이 다른 사람과 세력, 집단을 대할 때는 가급적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정리한 글로 써 대응해야 한다. 옳고 그름, 상식과 몰상식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기감정에 충실한 글쓰기는 얼마든지 허용 가능하니, 안심해도 좋다. 오히려, 시, 소설, 에세이야말로 읽는 이의 자발적 동의, 이해와 관용을 끄집어내는 최선의 수단일지 모른다.

그렇다. 편견과 두려움 없는 글쓰기와 퇴고, 책(브런치 북) 발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글이 계속 쓰이고 읽혀야 어젯자로 숨진 상식이 오늘 다시 소환되기도, 오늘자 상식이 내일의 야만이 되기도 한다.


소재의 제한과 편견 없는 글쓰기는 상상력의 원천임과 동시에, 타인의 소(小) 우주를 이해하고,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다.


어쩌면, 상식은 숨진 채 발견되는 게 당연하다. 다시 발견되고, 평가되고, 뒤바뀌는 과정이 반복되는 일이야말로 상식에 부합하는 게 아닐까.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상식이란 18세까지 습득한 편견의 집합에 불과하다.


상식의 불완전성, 전복 가능성을 인정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관용이 시작된다. '나는 당신의 생각에 반대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는 볼테르의 말이 자주 떠오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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