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와

엉뚱한 상상

by 영샘

중학생 시절, 나는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 시절 라디오 방송은 지금보다 광고 송출 횟수도 적었고 노래도 끊지 않고 끝까지 틀어주었다. 라디오를 통해 최신 가요를 자주 들어서 가사도 줄줄 외웠다. 그러던 중 교복이 하복으로 바뀌는 초여름, 한 신인가수의 노래가 나를 사로잡았다.


창밖을 봐 눈이 와 그렇게 기다리던 하얀 눈이 와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주는 하얀 눈이 와


지금 여름인데 눈에 관한 노래라니.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하며 가사를 잘못 들었나 의문을 가졌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곡은 당시 신인가수 지누의 ‘엉뚱한 상상’이라는 노래로, 여름에 상상하는 눈 내리는 성탄절에 대한 노래였다. 그래서 제목에 ‘엉뚱한’이 들어간, 신인의 패기가 느껴지는 도전적인 데뷔곡이었다. 부제는 ‘White X-Mas를 기다리며’로, 당시 부산에서 살았던 내겐 눈 내리는 성탄절은 이미 현실감이 없었기에, 노래의 발표 시기는 어쩌면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노래를 꽤 오래 흥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해 추석 연휴 명절을 보내러 큰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불렀더니 부모님이 황당해하셨다. 지금 한창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데 눈이 오면 어떡하냐고, 왜 그런 노래를 부르냐고 하셨다. 이 노래는 상상일 뿐이라고 했지만 결국 부모님 앞에서는 더 이상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 곡은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는데 모두 겨울 시즌에 발표되었다. ‘겨울철에 부를 거라면 더 이상 엉뚱한 상상이 아니지 않나요?’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이 노래는 오히려 겨울에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금 사는 곳은 매해 겨울마다 눈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부산 출신임을 확연히 드러내며 눈을 반겼다. 그 후 출퇴근길과 차창에 쌓인 눈 치울 걱정부터 하는 현실적인 어른으로 변했다. 그러다 직장에서 눈을 맞으며 눈을 쓸었던 날 이후 더 이상 ‘엉뚱한 상상’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이제 나는 눈이 와도, 쌓이지 않고 모두 녹아버리는, 부산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여기서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다.

월, 토 연재
이전 08화지키고 싶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