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기여행 중 일어나는 여행 권태기

헝가리 여행기 -9

by 박희성

빛나는 도나우 강이 흐르는 부다페스트와 부다 궁전을 보고 난 이후 허무함이 휘몰아칩니다. 성벽을 터덜거리며 내려오는데 더 이상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물론 아름다운 도시이긴 합니다. 아름다운 강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행복에 겨워 웃음이 흘러넘치고 사진 속 헝가리는 완벽합니다. 또 오늘 하루 멋진 성당도 만나고, F1 프로모션도 보고, 에어쇼도 만났는데 왜 만족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사실 헝가리가 생각보다 재미가 없습니다.


1525189967113.jpg?type=w1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너무 큰 기대감 때문이었을까요. 부다페스트는 오기 전부터 너무 많은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어디에 야경이 예쁘다, 어디에 무슨 맛집이 있다, 어디에 무슨 풍경이 예쁘다... 수많은 정보가 가랑비처럼 찾아와 기대감을 증폭시켜 두었습니다. 너무 큰 기대가 오히려 실망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보기 좋지만 정보의 폭우로 젖어버린 눈에 기대감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마음 한편에 ' 그래 멋있어, 근데 이게 다야?' 하는 심정이 곰팡이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오전부터 마음속을 차지한 곰팡이를 애써 무시하고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 이 생각을 태웠지만, 부다 성에서부터 몰려오는 구름에 또다시 곰팡이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옵니다.


아마 지속적인 같은 풍경에 대한 피로감도 함께 쌓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돌아본 모든 동네가 비슷합니다. 적은 여행 지식으로 많은 나라를 겉핥기 식으로 다니다 보니 그 나라의 심도 있는 이야기를 보고 듣고 배우지 못하고 유명한 관광지 위주로만 다녔습니다. 여행기가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인 이유도 다름없습니다. 여행기와 가이드북에 나온 대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에 걸친 여섯 도시의 구시가지를 둘러보았고 모두 다 아름답고 귀엽지만 반복될수록 비슷한 동화 속 이야기 같아 보입니다. 마치 좋아하는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서 들어서 질린 것처럼 비슷한 구시가지의 반복이 안타깝지만 질린 듯합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풍경인 헝가리에서 그동안 쌓아 온 마음속의 피로가 터져 나온 것 같습니다.


1525191725823.jpg?type=w1


피로함이 온몸을 감싸 더 이상 무언가를 보고 싶은 갈망이 사라졌습니다. 터덜거리며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로 도착했으나 지하철 입구에는 집시로 보이는 무리가 해도 지기 전인데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며 놀고 있습니다. 이런 위험에 대한 피로도 한층 더 쌓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디를 가도 CCTV가 설치되어 있고 물건을 훔쳐 가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라 내 물건을 지킨다는 강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에서 카드를 도난당해 큰돈을 잃어버렸고 갈수록 치안에 대한 악명이 높은 도시가 나타나다 보니 카페나 음식점,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물건 조심에 온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이외의 위험이나 위협에 대해서는 수도 없으니 말하기도 힘듭니다. 물론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 중 이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당한 경험조차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소심하고 겁 많기로는 한국에서도 1~2위를 다투는 저로서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습니다.


1525191721684.jpg?type=w1


이런 모든 권태감을 끌어 앉고 숙소로 도착해 무기력하게 침대에 몸을 던졌습니다. 함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친구 하나라도 옆에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 외로움과는 또 다른 외로움입니다. 슬픈 건지 다행인지 오늘은 숙소에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은 무심하게 번개와 함께 창문을 강타하는 천둥을 가지고 와 밤새 잠에 들지도 못하게 괴롭힙니다. 내일은 또다시 크로아티아로 가야 합니다. 이 여행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리스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크로아티아는 지금과는 다르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천둥 속에서 슬며시 잠에 들었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연 가득한 부다 성과 춤추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