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수제비로 관통하는 엄마와 나의 추억. 한식X브런치
엄마는 꼭 한여름 중순만 되면 김치 수제비를 해 주셨다. 양평 두메산골에서 7남매로 북적거리는 집안에서 자라신 엄마의 가난한 어린 시절에는 해산물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때문에 엄마가 배워온 김치 수제비의 조리법은 매우 간단했다. 밀가루 반죽을 숙성시키는 동안 잘 익은 김치를 기름에 볶아 고소하게 맛을 내고, 물을 넣어 끓이면 요리의 절반이 끝이다. 흙을 씻어낸 호박은 큼직하고 투박하게 썰어 넣고 양파와 청양고추도 눈물을 참으며 대충 잘라 넣고 다진 마늘까지 넣으면 완성이다. 물론 밀가루 반죽을 툭 툭 뜯어 넣는 일을 까먹는 상황은 없었다. 한 여름에 이렇게 뜨거운 음식을 만드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자식인 우리 남매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완성된 수제비를 별미라고 생각하며 먹기만 하면 끝이었으나 뜨거운 불 앞에서 요리하는 엄마는 더위 따위는 아무 일도 아닌 듯 수제비를 만드셨다.
마치 의식처럼 국물 먼저 맛을 보면 시원하고 새콤한 김치 국물이 코 끝을 맴돈다. 수제비만 젓가락으로 씹으면 적당히 국물이 밴 수제비가 씹히는데 텁텁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땀방울이 삐질 흘러나오면 본격적으로 숟가락에 국물과 수제비, 양파를 올려 입에 집어넣는다. 속도는 점점 빨라져 먹다 보면 게걸스러워지지만 숨도 쉬지 않고 먹어 치운다.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김치와 잘 익은 호박은 젓가락으로 먹으면 어느새 한 그릇이 끝난다.
시원한 국물의 김치 수제비는 마치 여름철 보양식처럼 항상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른 계절 다른 날에 수제비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해물을 잔뜩 넣거나 다른 재료를 듬뿍 넣어 다양한 맛의 수제비를 해 주셨지만 뜬금없이 여름만 되면 만드시는 김치 수제비는 생일날 미역국처럼 당연했다. 그리고 그 맛과 한 여름의 뜨거운 김치 수제비와의 추억들은 성인이 되고 서서히 잊혔다.
이 추억이 소환된 곳은 뜬금없이 몬테네그로라는 발칸 반도의 작은 나라였다. 혼자 동유럽 종단 여행을 하던 중 다른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 하루 들린 코토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우연히도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소형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한국인 교민이라고는 11명밖에 없던 작은 나라였는데 사장님 내외는 수개월만에 한국인이 찾아왔다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제 코토르에 사는 사람이 12명이 되었다는 농담과 함께 코토르에 대한 정보를 쉴 틈 없이 쏟아 주시고 하루 밖에 머물지 않으니 빨리 돌아보라고 재촉하셨다. 밖에 나가서 먹으면 다 돈이라며 샌드위치와 물을 챙겨주시는 건 오랜만에 느낀 정이었다. 한참을 걸어 다니며 마을을 빠짐없이 구경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 고민하다 우선 숙소로 들어갔는데 부모님보다 조금 더 연세 있으신 사장님은 맨발로 반겨 주시며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코토르는 한국 음식은 차로 2~3시간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 가져와야 하는 산으로 둘러싸인 외딴 호수 마을이었다. 평소에는 남들처럼 빵이나 파스타로 허기를 채워왔지만,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이라며 아까운 김치를 풍족하게 넣어 김치 수제비를 만들어 주셨다. 심지어 수십만 원을 들여 가져온 된장과 고추장도 아낌없이 사용해 주셨다. 여행 중에는 언제나 뜨끈한 국물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자박하게 끓인 김치 수제비의 황홀한 모습을 보자마자 침샘이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사모님은 마치 집에서 밥 먹을 때 엄마가 해주시는 것처럼 수저로 수제비를 뜨면 그 위에 각종 반찬을 올려주셨다. 몸 둘 바를 몰랐지만 사장님 내외는 자신들의 식사보다 내가 밥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사실 게스트하우스라는 공간은 돈을 지급하고 내 공간을 구입하는 것이 아닌, 잠자리를 구입하는 냉정한 거래의 단편이다. 집주인은 임대 규정에 포함된 식사만 지급하고, 소비자는 잠자리라는 개인적인 공간을 개인이 점유하지 못한 채로 사용한다. 사장님은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으로서 주변 정보를 제공하는 호의나 간단한 요깃거리 정도만 제공할 수 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인을 보고 몬테네그로에서 한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정을 김치 수제비라는 음식으로 끊임없이 뿜어내 주셨다. 동유럽 구시가지 안의 작은 다락방 같은 집에서 먹은 김치 수제비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의 집에서 만들어진 작은 기억의 조각을 끌어냈다.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어린 시절의 추억의 조각이 궁금해져서 엄마에게 한 여름만 되면 김치 수제비를 만든 이유를 물어봤다.
“너네 외할머니가 그맘때가 되면 항상 저녁에 가마솥에다가 그렇게 수제비를 해줬어. 큰 가마솥에다가 김치 볶는 냄새만 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그때는 뭐 먹을 게 있니. 항상 산나물에 작년 김장 때 담가 둔 신김치, 요즘처럼 냉장 보관도 아니고 땅에 묻어 둔 김치라 이맘때면 장독 열기만 하면 신냄새 때문에 눈 아플 정도였어. 그리고 뭐 해봤자 장아찌 이런 거만 먹다가 수제비 하는 날은 이모랑 엄마랑 신나서 저녁 먹어라 소리 나오기도 전에 달려왔지. 노인네가 또 한 여름에는 뜨거운 것 먹어야 건강하다면서 여름만 되면 우리는 신났지. 꽁보리밥 안 먹어도 되고. 밥 다 먹고 나면 항상 집 앞에 평상에 우리 어린애들은 다 같이 누워서 별구경하고. 너네 시골 가도 지금은 밤이 돼도 드문 드문 별이 보이는데, 너 나이 때 애들은 진짜 은하수 본 적 없지? 하늘이 시꺼먼 게 아니라 별이 말 그대로 쏟아 내리듯이 하늘을 빈 틈 없이 꽉 채웠어, 예전에는. 그럼 하늘이 새하얗게 보이는데 평상에 누어서 별 보면서 노래하고, 깔깔거리면서 웃고. 그럼 또 할머니는 고구마랑 옥수수 이런 거 쪄 주고. 중학생 때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나도 서울로 올라오고 명심이 이모 과천 가고 명애는 시집가고 뭐 다들 바쁘게 살면서부터 못 먹어서 그런가. 이제 다들 살만 해지니까 꼭 여름만 되면 엄마는 김치 수제비가 당겨. 아휴 엄마 얘기하니까 또 눈물 나네.”
이 세상에 음식이 가진 추억이라고 하면 수도 없이 많다. 특히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두런거리며 먹는 한 끼의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욕구의 해소가 아니다.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하나가 되어가는 의식과도 같다. 그리고 그 의식은 우리의 머릿속에 음식의 향과 맛과 분위기와 대화가 어우러져 새로운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엄마가 해준 수제비와 코토르에서 만난 수제비는 나에게는 “정”이라는 생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엄마는 할머니가 해 주신 수제비를 통해 어린 시절의 행복하기만 했던 추억과 가족 간의 “정”을 쌓았고, 외할머니에 대한 사라지지 않는 추억을 기억의 도서관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