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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들의 낚시

낚시는 내 동굴이었다

by 박희성


입춘이 지났다 하더라도, 2월의 바다는 춥다. 아직 멈추지 않은 동장군의 매서운 기세는 바다를 건넌 바람이 되어 세차게 볼을 때린다. 밤에는 산에서 바다로 바람이 분다는 과학 시간의 이론은 엉터리였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고기들도 먹이 활동이 뜸하다. 가끔가다 철 모르는 눈 먼 물고기가 아닌 이상은 얕은 항구에서 낚시는 부질없는 헛손질일 뿐이다. 찬 바람에 흔들리는 낚시대는 마치 물고기가 미끼를 물어 살랑거리는 듯한 착시를 자아낸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낚시대를 들어봐도 가끔 올라오는 불가사리 외에는 어떤 생명 활동도 감지할 수 없다. 그나마 해가 떠 있을 때는 추위를 참을 수 있다. 해가 저물면 살이 아린 추위가 찾아온다. 제일 먼저 손과 발이 차가워진다. 핫팩도 없는 발은 두꺼운 양말을 신었더라도 해가 지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아파온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춥지 않다고 뇌를 속여봐도 고통에 익숙하지 않는 발은 바늘로 찌르는 기분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어도 차가운 칼날을 들이미는 바람에 뼈가 아프다. 추위 때문에 온 몸이 웅크려져 있어서 관절이 딱딱하게 굳어 서 있기도 힘들어진다. 이렇게 추워도 던져 둔 낚시대는 거두어 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추위를 잊으려 어두운 밤 하늘 속 혼자 밝게 빛나는 야광 찌만 바라본다.


이런 날 낚시를 1퍼센트의 낚시라고 한다. 물고기가 바늘을 물 확률이 1퍼센트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온도 내려가 물고기들이 활동하지 않고, 물때라고 불리는 조류 (물의 흐름)도 움직이지 않아 원하는 방향으로 물고기를 유인할 수도 없다. 함께 여행 온 친구들은 겨울 바다의 매운 맛을 보고는 미친놈이라는 외마디를 던지고 숙소로 돌아갔다. 외로운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아래에는 나같은 낚시꾼 한 두 명만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두가 자세가 똑같다. 난간에 비스듬이 세워 둔 낚시대 끝은 야광찌만 밝게 빛나며 하늘의 별 하나 더해주고 낚시꾼들은 별을 쫓는 아이처럼 차가운 입김을 내뿜으며 고개만 치켜들고 있다. 두껍고 검은 패딩으로 둘러 쌓여 입김이 나오지 않는다면 저게 사람인지 그림자인지, 또는 폐타이어 쌓아 둔 것인지 분간되지 않을 것이다. 백 번 낚시대를 던져 한번이라도 입질 오면 감사해 하는 아둔한 무리이다.


‘이런 미친놈들아. 그렇게도 낚시가 좋냐.’


속으로 나를 포함한 외로운 조사들을 향해 자조적인 한탄을 한다. 저들은 과연, 나는 과연 무엇을 낚고 싶은 것일까. 잡어 중에 잡어라 불리며 언제나 낚시를 방해하는 전갱이나 고도리(고등어 새끼)라도 한 마리 올라와 주면 이 낚시가 끝이 날까, 아니면 바다 저 끝에서 아침해가 수평선을 따라 올라오며 세상이 밝아지면 끝이 날까. 끝나지 않는 전쟁처럼 어리석은 낚시는 이어지고 있다. 물고기를 낚아 올린다 한들 지금 잡은 물고기를 먹을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어두운 밤에 날카로운 횟칼을 들고 물고기 손질을 할 수도 없고, 설령 아이스 박스에 담아 살아 있는 채로 가져가도 성질 급한 물고기들이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다. 지금 하는 낚시는 먹기 위해서 낚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우리는 캐치 앤 릴리즈( catch & release : 물고기를 잡았다 다시 놓아 주는 것. 살생이 아닌 손맛을 위한 낚시 방법)를 위해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일까. 단지 그 손맛 하나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이라면 손맛 좋은 물고기, 가령 감성돔이라던가, 손바닥을 넘어 어른 팔뚝만한 물고기라던가, 아무튼 이런 물고기들이 아니면 손맛 봤다 싶을 정도의 만족을 충족하지 못할 것인데, 이 시간, 이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놈들이다.


장판파를 지키는 장비 같은 기세의 추위가 이놈하고 소리치고 있지만 초라한 낚시꾼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아마 저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걱정으로부터 격리되고 싶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50m 정도 되는 짧은 방파제에는 추위가 있을지 언정, 연애에 대한 걱정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직장 상사도, 밀린 숙제도 없다. 스마트폰 조차 추워서 액정이 나가 터치도 되지 않으니 쏟아지는 국가에 대한 걱정이나 정치에 대한 걱정, 스포츠 팀에 대한 걱정도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걱정으로부터 거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이격 되어있다. 눈 가리고 있는다고 해결되지 않았지만 눈 앞에 사라진 걱정 덕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낚시대를 바라볼 수 있다. 나도, 15m 떨어진 아저씨도, 그 멀리 담뱃불만 보이는 아저씨도 같은 마음으로 이곳에 앉아 있다. 어찌보면 소설 『무진기행』 의 무진이 따로 없는 셈이다. 주인공이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 마다 서울에서 도망치듯 무진을 향했듯이, 나도, 그리고 이 추운 날 수 시간 째 미끼만 갈아 끼고 있는 저 낚시꾼들도 무언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로부터 도망쳐 이곳에서 나마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초연하게 드리운 낚시대만 바라보고 있다.


알고 있다. 나의 걱정거리, 방해 요소 그리고 나를 너머 우리의 걱정이 낚시대 앞에 있는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맹수에 쫓겨 머리만 모래에 숨기고 바들바들 떠는 타조마냥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이 걱정들로부터 강제로라도 떨어져야 속이라도 편하다. 비단 낚시를 하는 우리만 이런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동굴을 만들어 눈 감고 피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낚시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게임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카페가, 술이 될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겐 친구나 연인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무진’을 가지고 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동굴에 숨어도 굳이 덮어 둔 암막을 거들쳐보며 밖으로 끄집어내는 몰상식한 인간들이 있다. 제발 나 좀 이곳에서 꺼내지 말아달라는 한심하고 한스러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부탁을 남기고 싶지만 남길 곳이 없다. 내가 숨을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이니까.


더 이상 추위를 버틸 수 없어 장비를 하나 둘 챙긴다. 옆 자리 조사님들은 꿈쩍도 하지 않아 마치 앉은 채로 죽은 시체같아 보인다. 담배 한 개비 물고 목이라도 데우면서 낚시 가방을 들쳐 멨다. 찬 공기가 불씨를 만나 따듯하게 속으로 들어온다. 담배 연기가 눈에 들어갔다. 눈물이 맺히지만 금방 얼어 붙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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