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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Aug 30. 2019

여행에서 일기를 쓰는 이유

크로아티아 여행기 -6


세상에서 가장 짧은 케이블 카를 타고 내려오면 생각보다 반 옐라치치 광장과 가까워 놀랍습니다. 광장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일기를 씁니다. 한국에서는 전혀 쓰지 않던 일기를 여행만 오면 마치 손이 뇌가 된 듯이 저절로 써집니다. 지금 마시는 커피의 씁쓸하고 고소한 맛, 옆 테이블의 케이크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설탕 향기, 그리고 맑은 하늘의 빛과 에너지, 재잘거리는 새의 지저귐과 종이의 감촉까지 모두 잉크가 되어 두꺼운 종이에 새겨집니다.


여행을 와야지만 펜을 드는 이유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새로운 오감 때문입니다. 쳇바퀴처럼 매일마다 똑같이 돌아가는 작은 세상만 바라보다가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여행을 하면 이 모든 경험과 신선한 자극을 놓치는 게 너무나 안타까워 모두 기록하게 됩니다. 물론 여행을 하지 않아도 하루하루 다른 태양이 뜨고 집니다. 하루를 자세히 곱씹어보면 그 하루의 새로움이 태어납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 그 집중해서 태어나는 하루의 새로움보다 더욱 강렬함에 감각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벌써 시간은 5시를 향해 갑니다. 저녁 시간을 알리는 위장의 꿈틀거림을 느끼며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걸어갑니다. 타이거 새우가 들어간 올리브 파스타와 콜라를 한 잔 주문하고 가만히 앉아 이 도시의 소음을 들어봅니다. 북적이는 듯 하지만 바쁘지 않고, 5분마다 들리는 트램 소리가 잔잔하게 다가오는 이 도시가 움직이는 소리를 또다시 기록합니다. 이어서 먹기 아까울 정도로 멋진 파스타가 한 상 차려집니다.                


                         

큼지막한 타이거 새우를 머리부터 꼭꼭 씹어 먹습니다. 새우 머리가 입 안에 걸려 따갑지만 새우의 진정한 맛은 머리에 있습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입 안으로 사라지고 파스타를 맛봅니다. 오일 파스타 특유의 올리브 향과 새우 기름의 바다 내음이 콧 속을 헤집고 다닙니다. 여기에 올리브와 가벼운 후추 맛을 거드니 지상 최고의 파스타가 입 안에서 춤을 춥니다. 사랑스러운 맛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새로운 자극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걸어 다닙니다. 그전에 아직 햇빛이 너무 뜨거우니 새콤한 사과 스무디 하나를 주문합니다. 얼음과 함께 사과가 갈리는 소리가 신나게 울려 퍼집니다. 스무디를 쪽 쪽 거리며 빨아 마시면서 골목마다 새로운 정취를 느낍니다. 사과 향이 코 앞에서 사라지지 않아 이 골목들은 사과 향과 함께 기억됩니다.


자그레브의 마지막 저녁은 아름다운 야경과 함께하고 싶어 360 전망대라고 불리는 홀로 우뚝 솟은 건물의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카페에서 못다 쓴 일기를 쓰기 위해 일몰 한 시간 전에 미리 올라갔습니다.                


                

해는 아직 기운 넘치게 떠 있어 해가 저문다는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아직 해가 지기 전에 올라온 덕분에 자그레브의 멋진 전망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캅톨 대성당부터 반 옐라치치 광장, 그리고 구시가지를 넘어 저 멀리 신시가지와 흐르는 강물까지. 전망대의 이름인 360처럼 360도 돌아다니며 자그레브의 모든 풍경을 가슴속 깊이 간직합니다. 헝가리에서의 실망이 마치 추진력을 얻기 위한 도움닫기가 된 것 같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첫 도시가 이토록 마음에 들 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커피와 함께 시내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일기를 또다시 펼쳤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멋진 그림으로 자신이 느낀 모든 감정과 감각을 기록할 것이고,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느낌을 아름다운 선율로 기록할 것입니다. 어떤 재능도 가지지 못한 안타까운 저는 이 아름다움을 시간이 지나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사진과 일기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마치 강박증처럼 이 모든 순간을 놓치기 싫어 펜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다시 이 기록을 펼치면 그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까요. 서투른 솜씨의 글이라도 나름 노력하여 이 추억이 증발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둡니다.           


                         

드디어 해가 저물고 멋진 야경이 펼쳐집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입니다. 오전의 태양빛으로 밝게 빛났던 캅톨 대성당이 드디어 노란 조명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광장 아래도 노란 조명 아래에서 색다른 풍경을 자아냅니다. 프라하나 다른 도시에서 봤던 휘황찬란한 야경은 아닐지라도 하루 종일 돌아다닌 구시가지를 높은 전망대에서 바라봅니다. 어둠이 붉은 지붕 위로 가라앉으며 푸른빛을 뿜어냅니다. 어둡지만 파란 밤하늘과 빛나는 길거리를 바라보며 오늘의 일기를 마무리합니다. 새로운 하루가 떠나갔고 이제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위해 숙소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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