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성 Sep 02. 2019

플리트비체가 준 행복과 안타까움의 사이에서

크로아티아 여행기 -7

입이 떡 벌어진다거나, 기뻐서 눈물을 흘린다거나, 혹은 머리가 띵한 충격을 받았다는 뻔하디 뻔한 감상은 그동안 진부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문을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거대한 폭포를 보는 순간 이 진부한 표현들이 이 순간을 표현할 유일한 문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새벽 5시가 되기 전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드디어 크로아티아 여행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물과 숲의 요정들이 산다는 크로아티아의 보석,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으로 떠나는 날입니다. 캡슐 호텔은 아직 조용하지만 혼자 분주하게 짐을 싸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려 했지만 방해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마치 그동안 밀렸던 울화통이 터지듯이 모든 최악의 상황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옵니다. 캐리어의 바퀴는 무게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낑낑대며 끌고 가는데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집니다. 새소리 대신 내리는 빗소리는 마음을 더욱 울적하게 합니다. 택시도 보이지 않아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합니다. 한쪽으로 쏠린 캐리어를 이끌고 비를 맞으며 겨우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버스 정류장이 너무 복잡하고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찾기가 힘듭니다. 삼재에 걸린 듯 모든 짜증이 밀려옵니다. 플리트비체를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는데 물의 요정을 만나기 전 짜증의 악마를 만나도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버스를 타고 비몽사몽 도착한 플리트비체의 1번 출입구는 흔한 등산로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북한산 입구처럼 생긴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여기가 그 유명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이 맞나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캐리어는 다행히 보관하는 곳이 있어 얌전히 보관해두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표를 받아 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부터 겪은 짜증 때문에 큰 기대감 없이 게이트를 통과하고 조금 걸어가니 굉음과 함께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폭포에서 나는 귀가 멍한 굉음과 함께 해가 갠 푸른 하늘과 우거진 수풀로 사람들을 반겨주는 플리트비체의 거대한 자연은 저절로 입이 벌어집니다. 게다가 맑디 맑은 호수는 푸른 하늘과 수풀을 빼닮아 고대 보석 같은 옥색으로 빛이 납니다. 오전부터 있었던 모든 일들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액땜으로 느껴집니다. 아니, 지난 여행에서 모든 짜증 났던 일들이 이 순간을 위해 일어난 액땜이었을 것입니다. 웅장한 자연을 바라보고 행복하다고 느낀 경험은 처음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풍경이 지구 상에 존재할 줄이야.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을 바라보는 기분입니다. 어서 저 자연 속으로 풍덩 빠져버리고 싶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광경을 조금이라도 낭비하지 않고 곱씹어 느끼고 싶어 한 걸음 옮기고 감상하고 다시 잠깐 걸어서 감상하기 일쑤입니다.     


                    

어디를 보더라도 아름답고 평화롭습니다.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신기함과 새로움의 연속이었다면, 이곳 플리트비체에서는 여행 중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껴봅니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호수가 가득히 차올라 더욱 반짝입니다. 깊은 호수 아래에는 숭어인지 은어인지 알 수 없지만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떠다닙니다.


이 완벽해 보이는 플리트비체에서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이 이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누구라도 옆에 있어서 이 모든 풍경에 대해 쉴 틈 없이 이야기하고 싶지만 인터넷도 터지지 않은 골짜기라 친구와 전화도 할 수 없습니다. 가슴속에서부터 감탄이 쏟아져 나올 듯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저를 빼고 모두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조용히 가슴으로 다시 끌어내립니다. 정지용 시인의 시 <호수>가 절로 떠오릅니다.

                 

         

행복과 안타까움의 한 뼘 사이에서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플리트비체를 거느립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분주히 걸어 다니며 안타까움 대신 행복을 더 누립니다. 그리고 안타까움은 가슴속에 남긴 채 언젠가 사랑하는 누군가와 다시 오기를 간절히 기도해봅니다.

이전 06화 여행에서 일기를 쓰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