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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Sep 07. 2019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혼자, 자다르 석양

크로아티아 여행기 -9


석양에 흠뻑 물들어 있느라 배가 고픈지도 몰랐습니다. 멍하니 태양만 바라보는데 배에서 갑작스러운 진동이 느껴집니다. 하늘도 이제 붉은빛과 푸른빛의 싸움이 끝나가니 저녁을 먹으러 가봅니다. 로마 유적 옆에 있는 멋들어진 레스토랑이라 값이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오늘의 분위기에 취해 우선 들어가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비싼 레스토랑에서 먹을 기대를 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예약을 하지 않아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물어가는 태양을 따라 더 걷다 보니 이탈리아어로 il padrino라는, 한국어로는 대부, 레스토랑이 눈에 띄었습니다. 대부 콘셉트의 레스토랑이라 신기해서 들어가니 유일한 손님입니다. 기분 좋은 날이니 에피타이저와 파스타, 화이트 와인까지 주문했습니다. 화이트 와인부터 홀짝이며 저 멀리 그을음이 남아 있는 석양을 만끽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 일몰을 즐기다가 마지막으로 수평선으로 사라지는 희미한 붉은빛을 보기 위해 바다 오르간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대리석 아래의 파이프로 살아있는 파도와 바람이 드나들며 오페라를 자아냅니다. 이 풍경이 영화의 거장 히치콕에게 어떻게 다가와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지 몰라도, 저에게는 마치 영화관 같습니다. 바닷가에 앉아 희미하게 사그라드는 불꽃같은 수평선 위의 빛을 바라보며 바다의 노랫소리를 들어보면 자연이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이 풍경, 이 음악 모두를 스크린으로 담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 섭니다. 



이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 설치예술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바로 태양의 인사라는 작품입니다. 자다르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히치콕의 한 마디와 이 두 예술품, 바다 오르간과 태양의 인사입니다. 낮에는 태양 에너지를 저장해두었다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면 그제야 낮에 태양이 숨겨둔 힘을 발산하여 다양한 빛의 LED를 발산합니다. 사라진 태양의 여운이 만들어낸 새로운 빛은 멀리 떨어진 연인과 그리움을 알콩달콩 속삭이는 기분입니다. 그 때문인지 수많은 연인들이 태양의 인사 위에서 함께 웃으며 발장난을 칩니다. 헤어질 연인도 없고, 그리워할 연인도 없는 저는 그 부러운 광경을 바라보다가 유일하게 그리워할 수 있는 태양을 그리워하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킵니다. 혼자라도 내일의 태양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자기 최면을 걸고 태양의 인사 위에서 태양이 남긴 인사를 받아 드리고 떠나봅니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을 뒤로하고 달팽이 한 마리가 제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줍니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세상 끝 연인을 만날 거라고... 패닉의 <달팽이>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 저절로 머릿속으로 재생되는 안타까운 나 홀로 여행가의 자다르 여행은 이렇게 하루가 저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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