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네그로 여행기 -2
코토르의 아찔한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이 엄청난 장관은 그동안 본 어느 전망대보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깎아내리는 듯한 절벽의 돌산이 병풍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고 반짝이는 태양을 반사하는 푸른 바다가 붉은 지붕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풍경은 절대 질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는 높디높은 산을 올라야 합니다.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지요.
미로 같은 구시가지의 벽돌 사이를 지나다니며 울퉁불퉁한 건물들이 만든 그림자를 통과하니 베네치아 시절 만든 거대한 요새가 나옵니다. 마치 게임의 한 장면인 컴퓨터 그래픽처럼 물에 비친 그림자마저 품격있게 서 있습니다. 돌산의 성곽으로 들어가는 길은 구시가지 안에도 있지만 크게 돌아서 가면 마치 고대 신전처럼 오르막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등산 삼아 올라갔습니다. 위대한 자연과 자연을 깎아 만든 인간의 창조물을 만나는 것입니다.
먹구름이 살짝 찾아온 높은 돌산은 까마득해 보입니다. 산마다 산세라고 하는 기운이 능선의 생김새에 따라 다르게 느껴집니다. 북한산은 서울을 포근하게 안아주지만 외부인은 단호히 거절하는 문지기 같은 생김새를 가졌고, 설악산은 동장군마저 얼어 붙이는 여포같이 강한 모습입니다. 코토르를 둘러싼 산은 수많은 절벽과 날카로운 바위 때문에 반항하는 사춘기의 야생말의 느낌이 납니다. 이 거친 야생마 같은 산을 달래기 위해 코토르의 사람들은 갈 지자 모양으로 지그재그 오르막길을 냈습니다. 성난 황소에 고삐 달기처럼 이 거친 산 위를 오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 듯합니다. 덕분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납니다. 마치 마추픽추를 오른 기분입니다.
돌산을 오르는 길 뒤에는 거친 피오르드 협곡이 펼쳐져 넓고 탁 트인 전경이 뒤를 지켜줍니다. 바다에서 산으로 불어 올라가는 기이하고 시원한 바람을 업고 오르니 힘이 덜 듭니다. 바람과 함께 올라가니 어느새 성벽의 뒷문이 눈에 보입니다. 한 시간가량 등산을 해서 나타난 평지 같은 구릉인데 이런 높고 거친 땅에도 집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은 있어서 다행입니다. 갑자기 다치거나 위험한 상황이 나타나도 민가가 있으니 안심입니다. 나무로 만든 동굴 같은 깊은 숲을 지나가다 잠시 앉아서 쉬는데 비가 쏟아집니다. 오전부터 산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던 먹구름이 본격적으로 비를 내뿜습니다. 다행히 구름 사이에 햇빛을 보니 여우비인 것 같습니다.
이 정도 비는 맞아도 될 듯해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왼쪽으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멧돼지 한 마리가 땅을 파고 있습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무언가 지나갑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얘집니다. 멧돼지는 다행히 사람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보이니 뒷걸음질로 몰래 도망갑니다. 사람이 살고 있어서 산에 주인이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주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멧돼지가 저에게 관심을 쏟기 전에 부리나케 도망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성벽으로 들어왔습니다. 멧돼지 때문에 정신없이 도망쳐 올라오니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 긴장이 풀렸습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집니다. 함부로 멧돼지의 땅에 들어간 제 잘못이긴 하지만 이렇게 오싹한 기분은 처음입니다.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땀을 닦고 뒤를 돌아 해안을 바라보는데 이번에는 다른 기분으로 소름이 끼칩니다. 하늘을 닮아 푸른 바다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감싸 안았습니다.
이렇게 멋진 장관을 보기 위해 오늘 이렇게나 힘든 일들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저 멀리 올라오는 성벽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벽이라는 것을 의심하게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코토르를, 몬테네그로를 느끼고 있으니 이보다 평온할 수는 없습니다. 오랜만에 산을 타서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