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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만 19시간, 알바니아 버스

몬테네그로 여행기 -4

by 박희성

여행을 하며 가장 떨리는 순간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정보를 얻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그 어떤 스포츠보다 긴장을 유발합니다. 몬테네그로에서 그리스로 넘어가기 위한 이 날도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몬테네그로와 그리스 사이에는 알바니아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몬테네그로와 그리스의 파트라스의 정보도 부족했지만, 공산주의 국가였다가 이제서야 수교해 북한과 더 친밀한 알바니아는 더욱 정보가 없었습니다. 버스를 미리 예매하려고 해도 알바니아어로만 구성된 버스 회사와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여행하는 내내 알바니아에서 파트라스로 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 한편에서 불안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아테네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지만 드라마 <태양의 후예>로 유명해진 아름다운 자킨토스 섬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트라스로 가야 합니다.


모로 가도 알바니아만 가면 어떻게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코토르의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친절하게 한국의 정을 알려주신 사장님 내외분들께 짧은 편지만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퀴가 망가지고 지퍼가 고장 난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로 가는 버스가 마중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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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의 두 도시는 버스로 6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서울에서 전주까지의 거리보다 조금 먼 거리지만 절벽 같은 길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전날 걱정으로 잠을 설친 몸은 금세 골아 떨어졌습니다. 버스는 잠시 휴게소에 멈춰 섰습니다. 휴게소에서 내려 지도를 보니 벌써 알바니아입니다. 알바니아는 지나가는 나라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정보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휴게소에서 여유롭고 행복하게 지나가는 마차와 농부를 보니 이 나라에 머무르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올라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나라도 여행해보고 싶지만 날짜가 다가오는 비행기 표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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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의 티라나에 도착해 드디어 문제의 표 구하기가 시작했습니다. 모든 버스 정류장에는 아테네행 버스는 판매한다고 쓰여있으니 파트라스로 가는 버스만 구하면 됩니다. 가장 가까운 매표소에 가서 파트라스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알 수 없는 알바니아 어입니다. 영어로 물어봐도 직원은 영어를 못하고, 알바니아어로 답을 해도 제가 알바니아어를 못하니 아테네행 표를 구할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한참 실랑이를 하던 와중 매표소의 직원이 답답했는지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하고 나가서 한 젊은 직원을 데리고 옵니다. 다행입니다. 비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반가운 언어는 한국어보다 영어인 듯합니다. 가까스로 표를 사고 한숨 돌렸습니다. 이제는 버스에서 남은 시간 무엇을 하며 버티느냐가 관건입니다. 간단하게 그리스식 케밥으로 요기를 때우고, 3시 정각에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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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나를 떠난 버스는 정처 없이 떠났습니다. 좌석에는 TV 모니터가 있었는데 한 채널에서 영화가 나왔습니다. 신기하게도 영화는 한글 자막을 달고 나오고 그 위에 알바니아어가 덮여 있습니다. 이 먼 타국에서 한국어 자막을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의 IPTV가 가장 빠르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에 올라온 영화를 받아 가기 때문이랍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지루하지 않게 버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버스는 기약 없이 도로를 달렸고, 잠시 잠에 들었다 일어나니 사람들이 중간중간 많이 올라탔습니다. 넉넉한 자리로 안락하게 가고 있었지만 버스는 어느새 승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다시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니 버스는 높디높은 산 사이에 있었습니다. 마치 한계령처럼 산 아래로 구름이 잔뜩 끼었습니다. 저 멀리 있는 산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도 쌓여 있습니다. 휴게소에서 잠시 내려 부대낀 몸을 풀며 경치를 구경하니 장관입니다. 벨보이처럼 버스에서 승객들의 짐을 들어주고 안내를 해주는 한 승무원이 휴게소에서 15분간 정차하니 그 안에 오라고 특별히 말해줍니다. 둘러보니 제가 버스에 있는 유일한 아시아인입니다. 남자는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아시아인이 신기한지 이런저런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는 "마이 프렌드"라고 호칭하며 알뜰히 챙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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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다시 달려 알바니아-그리스의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비 EU 국가와 EU 국가의 국경이라 경비가 삼엄합니다. 여태 달려왔던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모든 사람들이 내려서 트렁크에서 모든 짐을 꺼내 열어두었고, 군인들이 하나씩 확실히 확인합니다. 삼엄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듭니다. 국경 검문소로 들어가려 줄을 서니 "마이 프렌드"라는 말이 들립니다. 승무원 친구가 고맙게도 다시 한번 챙겨줍니다. 위험해 보이지 않는 아시아인은 1초 만에 국경을 통과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기나긴 질문 행렬을 통과합니다. 제일 처음 통과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는데 히트맨처럼 머리를 빡빡 밀고 양복을 입은 한 알바니아인이 친근한 인사를 건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알바니아인에 대한 그리스의 검문이 무척이나 까다롭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난민 때문인지, EU 때문인지,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인지 알바니아인이 그리스로 들어가는 일은 정말 힘듭니다. 알바니아와 그리스에서 사업을 하는 이 남자는 한 달에 두세 번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5분 이상 붙잡아 두는 검문소 직원에게는 20유로 정도의 뇌물을 줘야지만 보내준다고 합니다. 그리스 경제 위기의 여파로 부패가 만연해졌다던데 이렇게 실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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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간을 국경에서 허비하고 버스는 다시 파트라스로 떠났습니다. 버스에서 잠들었는데 승무원 친구가 깨워줍니다. 드디어 파트라스에 도착했나 봅니다. 그런데 지도와 사진에서 본 것과 다르게 깜깜한 암흑천지입니다. 승무원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면 차가 올 테니 그 차를 타고 가라고 말을 해줍니다. 분명하게 들었는데도 걱정이 됩니다. 낯선 땅에서 불빛 하나 없는 곳에 낯선 사람 열 명과 짐만 덩그러니 놓이고 버스는 떠났습니다. 지도를 보니 시내까지 걸어서 한 시간인 먼 곳이고, 지나가는 택시는커녕 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기다리는데 저 멀리 승합차 한 대가 다가옵니다. 차에서 내린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 승합차를 타고 시내까지 가는 것이랍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차에 올랐습니다. 장기 밀매나 인신매매 같은 불안한 생각들이 떠오르고 인생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다행히 염려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파트라스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새벽 3시입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버스 타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승합차 기사에게 호텔의 위치를 물어보고 무거운 캐리어와 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호텔로 이동했습니다. 그리스는 확연히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새벽 3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술집들이 영업 중이었습니다. 한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것 같습니다. 덕분에 도시의 무서움이 사라졌습니다.


길고 길었던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호텔에 들어가서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침대에 눕자마자 기억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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