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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후예의 섬, 자킨토스까지 한 발자국

그리스 여행기 -1

by 박희성

몬테네그로에서 그리스로 오는 19시간의 버스의 피로는 몸에서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체크아웃 한 시간 전에 겨우 물먹은 솜 같은 몸 덩이를 일으켰습니다. 간단히 씻고 짐을 챙겨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드디어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나왔던 아름다운 난파선의 섬 자킨토스로 향합니다. 이 순간을 위해 19시간의 고통을 참았습니다. 호텔에서 자킨토스로 향하는 페리를 타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호텔에서는 기차역 쪽으로 갔다가 어느 방향으로 가면 어떤 터미널이 나오는데라고 하며 빠르게 말을 쏟아냅니다. 대충 어디론가 가면 되는 것 같아 이해한척하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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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EL이라는 회사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고 그래도 인터넷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섰는데, 어쩌다 보니 기차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분명 여기서 버스를 타야 페리 선착장으로 갈 수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은 것입니다. 평소 같으면 길을 잃어도 새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며 구경하겠지만, 오늘은 오늘 내로 페리를 타야 자킨토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휴대폰을 보며 안절부절 하는 와중에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흰머리가 희끗거리기 시작한 그리스인 할아버지입니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나오는 배우 앤서니 퀸처럼 강렬한 눈썹이 인상적인 이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분주히 돌아다닌 동양인 꼬마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나 봅니다. 다가온 할아버지는 어디로 가는지 물어봅니다. 휴대폰을 보여주며 이 회사를 찾아가서 자킨토스행 페리를 타야 한다고 설명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따라오라고 합니다. 길을 아는 것인가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따라오라고 말하자마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곳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봅니다. 이 길을 아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더니 드디어 방향을 잡고 함께 걸어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어봅니다. 배를 타던 선원이었던 할아버지는 한국이라고 말을 하자 일반적으로 나오는 대답과 다르게 울산, 부산, 여수를 말하며 한국에 가 본 적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서툰 한국말을 선보여 줍니다.


한 나라에 처음 도착해서 이런 이유 없는 호의를 받게 되면 그 나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언제나 새로운 나라나 새로운 도시에 가면 나타나던 두려움이 호의를 만나 사랑스러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그리스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안전하고 정확히 페리 표를 사는 곳으로 왔습니다. 고마움을 전달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마치 신선처럼, 아니 그리스니까 여행의 신 헤르메스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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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가득했던 구름은 어느새 맑은 하늘로 뒤바뀌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페리를 타기 위해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거리에 있는 키리니라는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파트라스에서 티켓을 사니 이 도시까지 가는 버스와 자킨토스로 들어가는 페리까지 한 번에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니 금세 키리니에 도착했습니다. 짙푸른 바다와 쏟아지는 태양이 반겨줍니다. 드디어 이 여행의 목적지에 가까워졌습니다. 러시아부터 시작한 이 길고 긴 여행은 마침내 이 아름다운 바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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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킨토스가 있는 이 바다는 이오니아 해입니다. 제우스의 방탐함과 헤라의 복수에 소로 변해버린 이오가 건넜다는 바다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페리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 나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다양한 언어더라도 이 사람들이 말하는 감탄사가 제가 내뱉는 감탄사와 큰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거대한 페리는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멋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깔끔하고 넓은 실내가 나옵니다. 배가 거대하다 보니 출항을 해도 멀미조차 없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소파와 안마 의자도 구비되어 있고, 커피와 빵도 함께 팔고 있습니다. 이런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는 달콤한 스무디가 어울립니다. 달달한 스무디 하나를 챙겨 밖으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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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속도로 항해하는 페리 덕분에 시원한 맞바람이 불어옵니다. 울렁이는 바다의 색은 푸르다 못해 날카롭습니다. 겨울의 러시아에서 시작했던 여행은 이제 여름의 지중해로 넘어왔습니다. <죄와 벌>과 <태양의 후예>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작품이 만들어 낸 수 천 킬로미터의 여행은 드디어 이 섬에 도착했습니다. 저 멀리 자킨토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간절히 바라고 바라던 그 풍경을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설레는 일인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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