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여행기 -4
군대에서 전역이 얼마 남지 않던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전역을 하고 할 일들로 버킷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하던 것이 바로 여행이었습니다. 어디를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여행책을 쌓아놓고 행복하게 여행 루트를 짜고 있던 어느 날, 부대에는 <태양의 후예> 열풍이 불었습니다. TV 보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던 군대에서 군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 이것만큼 재밌는 것이 있을까요. 군대에 관해 틀린 부분을 함께 욕하면서 지적하고, 두 커플이 사랑을 속삭이면 나도 전역하면 저렇게 여자 친구가 생기겠지라는 속마음을 가지며 한 명도 빠짐없이 시청했습니다.
그리고 극 중에서 송혜교는 "어떻게 이런 곳이 있죠? 기절하게 예뻐요!"라는 대사를 했습니다. 하얀 백사장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하늘색 바다, 그리고 난파선이 있어 더욱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나바지오 해변이었습니다. 그 순간 어디로 여행을 하던, 마지막 목적지는 무조건 자킨토스의 나바지오 해변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바지오 해변을 가기 위해서는 버스와 버스의 고통을 이루 헤아릴 수 없게 겪어야 해서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이 해변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며 이내 기운을 차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꿈에서도 나오던 나바지오 해변을 가게 되었습니다.
전날 밤에 하늘을 보니 구름이 끼어서 별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완벽한 해안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그리고 그리며 이곳까지 왔는데 혹여나 비라도 올까 봐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니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맑고 투명합니다. 바다를 그대로 하늘로 옮겨 놓은 듯 푸른색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습니다. 호텔이 있는 동네의 모든 여행사에서 이 나바지오 해변 투어를 판매했기 때문에 전날 미리 예약하고 전달받은 시간에 여행사 앞으로 갔습니다. 혹시나 시간을 놓칠 것을 걱정해 20분이나 먼저 갔지만 흥분과 들뜬 감정을 감추지 못해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버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타고 있습니다. 평소 다른 로맨틱한 곳을 갔을 때는 혼자인 게 외로웠지만, 나바지오 해변만 머릿속에 들어가서 외로움도 느끼지 못합니다. 버스는 곧 선착장으로 승객들을 데려다주고, 우리는 작은 보트에 탑승했습니다.
배 밑바닥에는 작은 유리창이 있어 맑은 바다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자킨토스의 바다가 얼마나 맑은지 자랑하듯 배 밑의 하얀 모래와 물고기들을 투명한 물을 통해 보였습니다. 배의 선외로 올라가니 햇빛이 물에 반사되어 반짝입니다. 햇빛이 바삭거리는 것을 보니 어제부터 날씨를 걱정한 것은 기우였습니다. 너무 파란 하늘과 바다라 어디가 경계인지 어지럽습니다. 배는 수십 분을 달리며 자킨토스의 해안을 전부 구경시켜줍니다. 배가 헤엄치며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간간이 튀어 오르는 물보라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파도에 햇빛이 부딪치며 부서져 바다에는 수많은 태양이 떠 있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바다를 즐기던 순간, 드디어 바다의 파랗고 진한 빛깔이 점차 하늘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웅장한 흰색 절벽 아래에 난파선이 나타났습니다.
파워에이드 같은 비현실적인 바다와 하얗고 거대한 절벽, 그리고 녹슨 난파선까지. 파랑새는 없다고 했지만, 저의 파랑새는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부푼 가슴을 안고 배에서 내려 차가운 바닷물에 발이 닿아 이 물의 감촉을 느끼니 플리트비체에서 생겼던 헛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혼자 실실 웃으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씰룩이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진정시켜 보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말 기쁘면 웃음이 이렇게 나오나 봅니다.
녹이 슨 거대한 난파선 가까이 다가가니 태양의 후예에서 그랬던 것처럼, 배 위에는 수많은 흰색 돌들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줄지어 나열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돌에 적어 배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한국어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태양의 후예>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더니 정말 돌에 한국어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타카로 가는 길, 시청률 대박. 꽃길만 걷게 해 주세요!"라는 돌도 하나 올려져 있습니다. 하현우-윤도현의 음악 여행 프로그램이 제가 오기 얼마 전에 찍었다고 합니다. 만약 일정이 맞아떨어졌으면 타지에서 슈퍼스타를 만날 기회였는데 아쉽습니다.
난파선 구경을 마치고 해안을 바라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다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절벽 아래의 그늘에도 누워보고, 바다에 들어가 시원한 물의 감촉을 느낀 이후,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앉아 살을 태웁니다. 해변에서 노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너무 꿈만 같은 일들이라 비현실적입니다. 맑은 햇빛 아래에서 바다 짠내를 맡으며 아무 음악이나 흥얼거리는데 우리 배에 탔던 가이드 아저씨가 혼자 있는 저에게 다가와 말을 겁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이라던 아저씨는 이 해변이 좋아 5개월 전에 이곳으로 와서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5개월째 하루에 한 번 이 해변에 오지만 아직도 이 해변이 너무나 아름다워 자신의 일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런 해변을 매일 볼 수 있는 직업이라니, 하늘이 내린 꿈의 직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평생 이 해안에서 살고 싶지만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배에 올라탔지만 아직도 미소가 끊이지 않습니다. 햇빛이 가득한 배 옥상에 앉아 난파선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배는 다시 푸른 바다를 향해 떠났습니다. 이 나바지오 해변 투어는 해변만 가는 것이 아니라 블루 케이지라고 불리는 수중 동굴과 각종 해안을 돌아보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배는 해안 가까이에서 이동하며 다채로운 해변의 모습들을 하나씩 보여주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 배는 드디어 블루 케이지에 도착했습니다. 하얀 기암괴석 사이로 세월이 만든 천연 동굴은 바람 소리가 들어갔다 나오며 신기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가이드의 신호와 함께 배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다로 다이빙합니다. 사람들을 따라 저도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혼자 왔지만 친구들이랑 온 것처럼 수영복만 입고 물에 들어갔습니다. 배에서도 바닥이 보이는 맑고 투명한 물속을 헤엄치니 바다와 하나가 된 기분입니다. 수영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물에 가라앉지는 않으니 개헤엄으로 요리조리 헤엄치며 혼자서도 잘 놉니다.
이렇게 행복한 섬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매 순간이 새롭고 어디를 가도 신기한 모습을 자랑하는 자킨토스. 투어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여흥이 남아 피곤해도 엔도르핀이 솟구칩니다. 자연을 보고도 이런 부푼 가슴이 생깁니다.
사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기가 죽을 때도 있었고, 외로웠던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섬에 있던 사이 모든 잡념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을 바라보면 외로움도, 걱정도 모두 부질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스러운 해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흐르는데, 걱정과 후회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아깝습니다. 그동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제 여행은 마지막 도시 아테네만 남았습니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 아름다운 지중해에서 클라이맥스가 폭발했습니다. 마지막 결말을 향해 떠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