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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욱 시인의 시는 시가 아니라는 교수님

시는 배우는 것일까 느끼는 것일까

by 박희성

수년 전, 하상욱 시인의 시가 참신한 시상과 파격적인 주제 선정으로 인기를 끌었다. 길어도 6행이 넘지 않는 시들은 언어 영역에서 보던 작가의 심상이나 고뇌, 주제 찾기보다는 재미가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시는 바로 이것이다.


서로가

소홀했는데

덕분에

소식 듣고 돼

-애니팡-


평론 교수님은 강의를 하시다 하상욱 시인을 언급했다. 그의 시가 시라면서 읽히는 대중이 한탄스럽다고 한다. 그리고는 시의 가치가 SNS에 한 줄 올리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며 삼행시와 다름없는 개그라는 말씀이었다. 교수님에게 시란 언어의 정수다. 생각을 가다듬고 가다듬어 짧은 단어 안에 숨겨낸 작은 이슬을 모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이 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상욱 시인의 글은 인기가 치솟았다. 정말 삼행시와 다름없는 개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인 것이고, 사실상 시가 아닌 것일까. 평소에 시를 얼마나 읽는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시는 지하철 승강장이나 화장실에 붙어 있던 시였다. 그런 시들은 마음에 담아 두기보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읽는 활자였다.


방에 있는 책장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전공 서적, 에세이, 소설, 여행기, 자기 개발서 사이에 시집은 단 하나였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던 박성준 시인의 <몰아 쓴 일기>였다. 나와 시는 이격 되어 있었다. 시를 즐기지 않는 삶을 살던 것이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시를 알아갈 시점부터 시를 공부로 배운 탓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읽어오던 다른 책들과 다르게 시는 유달리 어렵게 배웠다. 초등학교를 막 들어갈 무렵 읽던 동화책은 초등학생이 된 이후 적당히 그림이 줄어든 대신 적당히 글씨가 많아진 책으로 바뀌었고, 청소년 시절이 되면 삽화가 가끔 들어간 책으로 넘어갔고, 수능 공부를 할 때 즈음에는 이제 두꺼워져도 읽는 것에 대한 쾌감을 느끼게 해 줬다. 땅에 물이 스미듯이 서서히 글을 읽는 것에 친숙해졌고, 산문은 게다가 다양한 난이도가 있어서 골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접한 동시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동시로만 존재하다 어느 순간 수능의 언어 영역에서 고전시가와 현대 시라는 이름으로 딱딱하게 찾아왔다. 글을 읽는 재미를 깨우치던 것과 다르게 수업 시간에 만나게 된 시들은 필요에 의해 읽어야만 하던 시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어디에 어떤, 무슨 의도가 있는지 찾아야 했다. 왜 시인이 그 단어를 썼는지, 무슨 심정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고민해야 했다.


작가의 숨은 의도, 색깔의 함축적 의미, 작가의 사상. 이런 것들이 나에게 시였다. 시의 즐거움을 알기 전에 억지로 외우듯이 의미를 찾아야 했다. 한용운 시인의 <나룻배와 행인>은 불교적이고, 수미쌍관의 구성을 가졌고, 나는 자신을, 당신은 조국으로 해설하고 인내와 희생을 통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를 가졌으며 시상의 흐름은 4연에 걸쳐 내가 당신을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나타내고 이 싸는 것을 빽빽한 공책에 옮겨 적으며 외웠다. 안도현 시인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은 현실 참여적이며 대조적 시어로 의미를 구체화하고 '~라면'과 '~되자'로 운율을 만들고 진눈깨비는 부정적 이미지, 함박눈은 긍정적 이미지를 나타내는 시라는 것을 별표 쳐 가며 분석했다.


하지만 시가 주는 운율의 기쁨이나 색상의 노래, 감정의 춤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당신을 기다리던 나룻배라는 화자가 얼마나 고조된 감정으로 시를 읊는지, 포근한 눈발이 내리는 창문가의 아름다운 모습과 붉은 상처에 대한 가슴 아린 모습, 그리고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고 단호히 말하는 모습을 어떻게 느낄 것인가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학생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출제자가 생각하는 의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시는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하상욱 시인의 시는 직관적이다. 시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숨겨두지 않았다. 글을 읽고 제목을 보면 재밌다. 물론 시인이 다른 의미를 심어두었지만 내가 해석을 하지 않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숨기지 않고 날 것의 말을 하는 하나의 농담처럼 시를 지었다. 그래서 밑줄 치고 공부하듯 분석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하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교수님의 말씀처럼 언어의 정수로 시의 언어 하나조차 음미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시를 즐기지 못한다 한다면, 차라리 이런 시들로 시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 것인가 서서히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서서히 글의 즐거움을 알아가듯이 시도 서서히 즐거움을 알아가며 많은 사람들이 시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하상욱 시인의 시도 좋은 시라고 인정할 만하지 않을까. 읽어서 좋으면 좋은 시인 것이다.



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시를 조금씩 즐기고자 하는 어리석던 사람이 고민한 글이니 교수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사람들은 무례한 저를 용서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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