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신기한 사람을 봤다. 빨간 고무대야를 타고 한강을 건너 화제가 되었다는 사람이 나왔던 방송의 캡처본이었다. 위험천만하게 어떠한 동력 기구도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김장할 때 쓰던 고무대야와 작은 노만 이용해 한강을 건넜던 이 남자는 서해안의 섬들을 15km에 걸쳐 일주하는 계획을 짰다. 물론 해경의 협조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구조요원과 구조선을 마련해 두고 시행하는 도전이었다. 서해안 일주는 한강과는 비견되지 않게 힘든 도전이었다. 강의 파도보다 훨씬 크고 강한 파도와 바다를 휘젓는 조류가 그를 방해했고, 내리쬐는 무더위는 그의 체력 소모를 더욱 가속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수 킬로미터를 오로지 손과 고무대야로 완주했다. 실패가 자명한 무모한 일임에도 도전을 포기하지 않고 성공한 것이다. 자신에게 향하던 파도를 극복하고 꿈을 이룬 도전자는 이제 고무대야만으로 독도를 간다는 새로운 꿈을 세웠다.
꿈을 이룬 기이한 도전에 대한 이 게시물을 보고 나서 나는 댓글로 눈을 돌렸다.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은 아저씨에게서 대단함을 느끼며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쓸모없는 짓에 해경과 구급대원의 인력과 구조선, 즉 세금을 낭비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의견은 팽팽하게 대립하였고, 결국 도전을 비웃는 자를 비난하는 측과 쓸모없는 경찰력을 낭비했다는 측으로 나뉘어 댓글 창은 싸움터가 되었다.
세금 낭비라는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무모한 자신의 도전을 방송을 통해 이뤘고, 그 방송의 도움으로 해경과 구급대원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것이었다. 고무대야를 탄 아저씨가 사비로 구조대원에게 자신의 안전을 보장한 것이 아니었고, 해경의 세금으로 그 사람들의 업무시간을 썼기 때문이었다. 또 이를 통한 도전도 인류의 큰 진보적 도전이 아닌 단순한 고무대야 안에서 물장구치는 도전이었다는 말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귀스타브 도레의 ‘서재의 돈키호테’ (1862년)
하지만 나는 아저씨를 보고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돈키호테는 쉰 살이 넘은 나이에 세상에 정의를 행한다는 꿈을 가지고 풍차로 돌격한다. 낡은 창과 방패와 굶주린 말로 무장한 돈키호테는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자신이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용감무쌍한 기사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런 돈키호테를 비웃기만 한다.
고무대야를 타고 독도까지 가겠다는 아저씨의 꿈은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 독도 주변은 파고가 서해와는 말도 안 되게 높고 과장하면 일 년 중 절반은 배도 결항되는 위험한 지역이다.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것이 차라리 더 안전해 보인다. 고무대야 아저씨의 꿈도 과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전혀 쓸모없는 일이자 세금 낭비였고, 돈키호테의 꿈 역시 사회 분위기와는 동 떨어진 허황된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 둘은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별종으로만 보였다.
이들의 도전은 정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허황되고 소모적인 행동일까. 세상에는 고무대야 아저씨 말고도 수많은 돈키호테들이 있었다. 히말라야 같은 높고 위험한 설산을 등정하던 등산가들이 있었고, 금을 만들겠다는 허황된 꿈을 가진 연금술사들도 있었고, 삼국지에는 유비도 있었다.
높은 산을 등정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에드먼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에 찾는다. 죽을 위험도 존재하고 어떤 생산적인 일도 아니지만, 꿈이기에 도전한다. 심지어는 무산소 등정이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이룬 사람들도 존재한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간다는 힐러리의 말처럼, 단순히 자신에 대한 도전을 위해 등정을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소모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연금술사들은 중세 교회의 천덕꾸러기였다. 종교가 우선 되어야 하는 중세 시대에 금을 만들겠다는 연금술은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신비주의의 이상한 현혹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을 현혹하는 마술과 함께 탄압당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연금술이 악마의 기술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금술로 금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쓸모없는 금속이 금으로 바뀐다는 허황된 꿈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걸었던 것이다.
유비도 역시 돈키호테였다. 유비는 어린 시절 아이들과 뽕나무 아래에서 놀며 “나는 이 나무같이 생긴 깃털로 장식된 커다란 수레에 탈 것이다.”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반역 모의다. 유비가 아무리 한 황실의 후예라고 하더라도 깃털로 된 장식을 하는 커다란 수레는 황제의 자리였고, 황제의 자리에 앉겠다는 것은 곧 역모이다. 성인이 된 유비는 신발을 만들어 파는 가난한 선비임에도 한 황실의 위태로움을 걱정했다. 자신의 미래가 더욱 불투명한 상황임에도 말이다.
보다시피 무모하고 해괴한 도전을 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을 시대를 가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되돌아보면 이런 돈키호테들 덕분에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소모적이고 위험한 꿈인 등산은 결국 하나의 산업이 되어 많은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다. 연금술은 화학의 주춧돌이 되어 결국 현대에 와서는 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뽕나무 아래에서 놀던 유비는 결국 촉한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돈키호테들의 꿈은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해줬고, 결국 꿈을 이루거나 혹은 꿈을 이루지 못해도 후대에 성공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길잡이로 나아갔다.
돈키호테 역시 떠돌이 기사로 정의 실현에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도전과 용기는 죽기 직전이 돼서야 인정받는다. 다만 정의 실현이 목표였던 그의 꿈이 남들에게는 정의 실현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도전과 용기, 그리고 다양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고무대야를 타는 아저씨는 이제 꿈을 독도 일주로 잡았지만, 그 꿈을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선을 줄 수 있다. 혹시 아는가? 무동력 뱃놀이가 새로운 여가로 발전한다면 아저씨의 도전이 그 기초가 될지. 어떤 도전이던 그 도전의 용기가 용인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돈키호테는 결국 마지막 결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는 화려한 꿈으로 가득 한 들뜬 떠돌이 기사에서 집에 틀어 박힌 우울증 걸린 노인으로 바뀌고 말았다. 모험은 끝났고 돈키호테였던 알론소 키하노(돈키호테의 본명)는 우울증으로 인해 쓸쓸히 죽어버렸다. 아저씨의 이야기에 달린 댓글을 보면 우리는 아직 돈키호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하다. 우리 시대의 돈키호테를 응원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로시난테를 뺏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