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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Jul 25. 2020

여행은 우연한 만남으로 풍부해진다.

우연한 동행은 우리를 바라나시 뒷골목과 빈민촌으로 초대했다.

 바라나시를 떠나야 되는 날, 우리는 한 라씨 가게에 갔다. 인도 전통 음료인 라씨는 우유로 만든 요거트와 물, 향신료로 (때에 따라 각종 과일을 넣어) 만든 요구르트와 요거트 사이의 음료다. 우리나라 카페처럼 길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라씨 가게지만 우리는 그중 소문난 가게로 향했다. 블로그를 통해 알려진 이 라씨집은 한국어 메뉴와 친절한 사장,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로 한국인들의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이미 한국인들로 모든 자리가 가득 차 있었다.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게는 묘한 동질감과 전우애가 솟는다. 한국인들이 득실거리는 유명 관광지라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분간이 안 되는 그런 곳만 아니라면 신기하게도 쉽게 친해진다. 현지인과 아무런 접점도 찾을 수 없는 여행지의 이방인들이 유일하게 소속감을 얻을 수 있어서 일까. 한국에서는 카페에 있는 동안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지만, 라씨 집에 모인 한국인들과는 동네 사랑방에 모인 어르신들 마냥 수다를 떨었다. 어디를 여행하고 있는지, 함께 온 사람은 누구인지, 한 마디씩 던진 한국어는 이내 근방을 코리안 타운처럼 한국어로만 북적였다.


 “여기 골목들은 예뻐 보이기는 하는데 다니기 무섭지 않아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일행 중 한 명이 대화 주제를 바꿨다. 우리처럼 친구와 함께 인도로 왔다는 일행이었다. 그 말처럼, 바라나시의 골목은 좁고 어두운 탓에 아무래도 위험해 보였다. 가장 안전한 치안은 위험한 곳을 피해서 다니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두려운 장소라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나시의 골목은 매력적이었다. 샤갈의 그림을 보는 듯 각기 다른 색들이 난립해 있었다. 보라색 건물이 있으면 그 옆에는 뜬금없이 노란색, 파란색 벽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조금 지나가면 초록색 문을 가진 분홍색 집이 나왔다. 유럽처럼 잘 정돈된 파스텔 톤의 비슷한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것과는 정 반대였다. 게다가 건물 사이의 틈도 소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그러니 마치 미술 시간에 배운 일점 투시처럼 다양한 건물들의 색감이 한 눈으로 들어왔다.

 이런 멋진 골목이 있음에도 무서워 가지 못해 안타까움을 속으로 삭히고 있었는데 저 대화 한 마디가 카페에 있던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결국 나와 내 친구, 그리고 말을 꺼낸 일행 두 명까지 합쳐진 ‘바라나시 뒷골목 탐사대’가 꾸려졌다. 네 명이라도 되도록이면 소도 들어가지 못하는 어둡고 좁은 골목은 피하고 상점이 존재하는 그나마 넓은 골목만 다니기로 했다.

 라씨 집을 나온 우리는 지도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길 따라 걸어갔다. 어차피 골목마다 갠지스강으로 향하는 길이 곳곳에 표시되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길을 잃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소 한 마리가 간신히 지나갈 거리는 마치 시장 골목을 보는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팔을 양 옆으로 펼치면 닿을 만큼 좁게 난 이 골목 사이로는 이미 수많은 상점과 노점상이 자리 잡아 더욱 좁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그 좁은 길목으로도 오토바이도 오르내리고, 소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개들도 여기저기에 늘어져 자고 있으니 한 걸음 떼기도 어려웠다. 앞으로 가기 어려우니 발걸음은 느려졌고 자연스럽게 눈은 주변으로 향하게 되었다. 4~5층 되는 높은 건물들이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고, 그 사이로는 전깃줄이 거미줄 마냥 얼기설기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건물마다 뛰어다니는 원숭이들은 과일을 한 조각 씩 쥐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달콤하고 새콤한 향기가 온 골목에 퍼지는 과일의 출처는 리어카 노점상이었다. 아저씨는 꽤나 능숙하게 원숭이에게 깎은 과일을 던져 주었다. 이를 신기하게 보던 행인들은 과일을 사서 아저씨를 따라 원숭이들에게 건네기도 하였다. 아저씨와 원숭이 모두 윈-윈의 장사였다.


 원숭이는 먹다 남은 과일 껍질을 사람들을 향해 던지기도 한다. 그래서 바라나시 골목에서는 위를 잘 보고 다녀야 했다. 머리 위에서 신나게 돌아다니던 원숭이를 구경하다 보니 돌바닥의 울퉁불퉁한 느낌이 사라졌다. 갑자기 부드럽고 미끄러운 소 똥의 불쾌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난처하고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고, 함께 가던 일행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목이 빠져라 위만 쳐다본 탓에 골목 어디에나 지뢰처럼 펼쳐진 소 똥을 미처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위와 아래만 살피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골목 좌 우에서는 언제 소나 오토바이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항상 살펴야 했다. 상하좌우를 모두 경계하며 동시에 즐기는 스릴이 있는 골목이다. 


한참을 걷던 우리는 잠시 짜이 집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150원짜리 짜이 한 잔을 홀짝이며 쉬었다. 계피 향과 더불어 달콤한 설탕과 홍차의 맛이 부드럽게 입 안에 남았다. 짜이를 마시며 인도에 대한 감상을 서로 나누다가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불과 한 시간 전 만난 사이들이라 이야기가 쉽게 굴러가지는 않았다. 조용히 짜이를 한 모금 입으로 더 가져가니 골목의 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무언가 파는 할머니가 길 가는 사람들을 잡는 소리, 저 멀리 들려오는 째는 듯한 오토바이 경적 소리, 소 목에 걸린 종소리. 익숙한 소리이기도 하지만 낯선 소리이기도 하였다.

지도를 슬쩍 보니 조금만 더 가면 힌두 대학이 나온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딱히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했으나 우리는 대학교를 목적지로 삼았다. 목적 없이 걷다 길을 잃는 것보다 최소한의 목적지를 두고 걷는 것이 조금이나마 더 안전해 보였다. 우리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골목길은 어느 순간부터 텅 비어져 보였다. 양 옆에 서서 높게 솟아올랐던 건물들이 하나 둘 낮아졌고, 상점과 노점도 점차 사라져 갔다. 이전과 다른 낯선 분위기였다. 전후 다큐멘터리에서 나올 법한 판잣집들이 폐건물 사이에 들어서 있었다. 이전의 왁자지껄한 시장바닥의 분위기는 사라졌고 조용히 바람만 스쳐 지나갔다. 이런 휑한 판자촌에서도 아이들은 해맑게 크리켓(연영방에서 행하는 야구와 비슷한 놀이)을 하고 있었다. 낡아빠진 나무판자로 배트를 만들어 놀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이상은 무섭기도 하고 볼 것도 없다 생각해서 돌아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위험할 수도 있던 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처음 보는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건물은 1층이었고 제대로 된 벽보다는 낡은 천과 판자로 둘러 쌓여 있었다. 소나 원숭이보다는 염소와 개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개들은 아직 온기가 남은 모닥불 사이에 옹기종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에 들어 있었고, 염소들은 무언가 질겅거리며 씹고 있었다. 판잣집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 염소 젖을 통에 짜 넣고 있었다. 그리고 낯선 우리를 경계하는 것인 것 신기한 것인지 힐끗거렸다. 이런 구석진 동네에 무슨 볼거리가 있어서 왔는지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전에 돌아다니던 바라나시 시내나 갠지스강 근처의 가트 주변과 또 다른 인도였다. 일종의 빈촌이었다. 빈민가라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다리 아래로 흐르던 물 때문이었다. 오 폐물이 섞인 시궁창 물이 회색을 띠며 세차게 흘러갔다. 우리가 익히 보던 세상과는 정 반대의 세상이었다.

우리는 사진기를 내려놓고 눈으로 빈민가를 둘러보며 서둘러 빠져 나갔다. 빈민가를 벗어나자마자 바라나시 힌두 대학교가 서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라나시를 떠나야 하는 기차 시간도 도달했다. 우리는 더 이상 둘러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함께 사진을 한 방 박고 헤어졌다. 여행은 우연한 만남의 연속이다. 갑자기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헤어진 후 시간이 지나 잊힐 때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우연성이 겹치며 우리는 여행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결성된 동행 덕분에 우리는 이런 새로운 인도의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좁은 인간관계나 시선으로는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던 새로운 세상이 나타난 것이다. 라씨 가게에서 함께 골목길을 가보자는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우리의 인도 여행은 그냥 유명한 관광 명소만 겉햝기 식으로 둘러보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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