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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Aug 05. 2020

아시아인들이 다 그렇지 뭐

나를 규정하는 인종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우리는 바라나시의 어지러운 골목의 한쪽 끝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게 되었다. 다른 여행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인도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매 하루에 3000원, 우리나라에서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침대 한 칸을 배정받았다. 여행할 땐 돈을 아껴야 한다는 신념으로 게스트 하우스만 찾아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관성처럼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게스트 하우스의 5층은 식당 겸 휴게실 겸 흡연실이었다. 날이 저물면 방에 있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인종을 불문하고 맥주나 혹은 간식, 담배와 그 비슷한 무언가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와 하늘을 천장 삼은 그곳에서 다들 들고 온 모든 것을 공유하며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낯선 도시의 어둠이 겁이 나 일찍 숙소로 들어온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옥상에 올라가 일기를 썼다. 며칠간 마주하며 인사했던 눈에 익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따라 올라왔다. 서서히 저무는 해와 함께 감성에 젖어 이 낯설지만 친근한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이 도시에 대한 서로의 감상으로 시작한 이야기의 봇물은 걷잡을 수 없이 다양한 대화로 양산되었다. 끊임없이 변하던 주제는 어느새 문신으로 바뀌었다. 서로의 문신에 대해 이야기하던 와중 한 명이 나에게 문신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아니라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구석에서 탁자를 칼로 긁고 있던 한 남자가 ‘당연히 없겠지.’라는 말을 하였다. 근육도 없고 어깨도 좁은 안경잡이라 무시하는 것인가 하고 기분이 나빠지던 그 순간 남자는 주머니에서 대마초를 꺼냈다. 담배처럼 생겼지만 색부터 확연히 다른 검은 이파리들을 얇은 종이에 싸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몸을 뒤로 뉘었다. 대마가 금지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남자는 한 모금 더 빨아들이고 코와 입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대마초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건네 졌다. 대마를 받은 사람은 한 모금 연기를 빨아들이고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건넸다. 반 바퀴 정도 돌았을까, 중국에서 영어 선생을 하고 있다는 한 사람이 나에게도 건넸다. 많은 해외 여행자들이 마주하는 호기심과 불법 사이의 선택에서 나 또한 고민하게 되었다.


 이미 하루에 한 갑의 담배를 태우는 골초였기 때문에 식물의 이파리를 태워 그 연기를 마시는 행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대마초라는 마약에 대한 호기심보다 속인주의의 한국 법률이 더 두려워 거절했다. 양 손을 펴고 살짝 흔들면서 나는 괜찮다고 하는 순간, 이 술잔 돌리기 같은 행위를 시작한 남자가 아직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말했다.


“아시아인들이 그렇지 뭐.”


 옆에 있던 인도인이 자신도 아시아인이라며 수습하려고 하였지만 한 번 차가워진 공기는 가슴 한편을 시큰하게 훑고 지나갔다. 인종 차별이나 마약의 폐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는 나를 '아시아인'이라면서 나에 대해 다 아는 듯 말했던 것일까. 캐나다인이었던 그의 관념 속의 아시아인, 특히 중국, 일본, 한국을 묶은 동북 아시아인은 미디어에서 보이는 스테레오 타입화 된 인종 그 자체였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으며 용기가 없기 때문에 문신이나 대마초를 하지 않은 인종인 것이다. 그의 눈에서의 나는 그가 미디어를 통해 만났던 “동북아시아인”, 덩치가 작고 자기주장을 펼치기보다 남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에 익숙하고, 학창 시절 뙤약볕에서 살을 태우며 운동하기보다 책상 앞에서 수두룩한 문제지에 둘러 쌓여 살아온 범생이 같은 ‘인종’이었다. 반박하고 싶지만, 사실 그가 생각하는 아시아인과 나는 완전히 부합했다. 부모님이 싫어하시니 문신을 하지 않았고, 법에 저촉되는 행위가 두려우니 대마초를 거절했다. 사기를 친 사람에게 당당하게 찾아가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싸우던 친구와 달리 나는 저런 소리를 들어도 가만히 앉아 있었고, 운동보다는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시간이 길었으며, 무리에서 조용하게 남의 의견을 수용하는 편이었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라는 산문집을 통해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하였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 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일 뿐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태초부터 보수적인 존재이다. 정치적인 의미의 보수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삶의 연속성을 가지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지 현실을 깨부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새로운 현상을 기피하게 된다. 이직이나 결혼, 혹은 새로운 도전에 큰 결심이 필요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틀을 깨거나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을 개척자 혹은 영웅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당장 일을 관두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만류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타인을 기호화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는, 기존에 만났던 익숙한 스테레오 타입에 그 사람을 끼워 넣는 보수적인 판단이 익숙하다. 이런 기조로 관상이라는 점복학이 과학만능주의의 현대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외국인을 보는 시선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생각해보니 나 또한 머릿속에 정립된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도 어디에서 외국인을 우연히 만나면 우선 입에서는 영어가 먼저 튀어 나간다. 그리고 대개 유쾌하고, 남들과 잘 어울리고, 맥주를 좋아하는 이미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눈 앞의 낯선 존재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체성이 대체되는 것이다. 


 물론 같은 나라에서도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스테레오 타입 된 인종적 성격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도 존재한다. 한국인임에도 내성적이기보다는 외향적인 사람이 있고, 타투를 가진 사람도 있으며, 법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큰 사람이 있다. 반대로 캐나다에서 자란 사람이더라도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 있고, 대마가 자유라도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성격의 인간군상은 나라나 민족을 뛰어넘어 존재한다.


 하지만 한 인간을 구성한 인종, 민족, 국가의 정체성을 빠뜨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인간은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유전자의 우성과 열성(과학적으로 두 유전자가 만났을 때 발현되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지 우생학적으로 우월하고 열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으로 인해 어떤 인종은 폐가 다른 인종보다 발달했고, 어떤 인종은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인종은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다. 인종으로 구분되는 인간은 이런 유전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때문에 사회의 관습이 겹치고 겹쳐 문화를 이룩한다. 그래서 그 문화 안에서 교육받고 자라온 사람을 규정하는 것 중 문화를 배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좁은 땅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그 좁은 땅에서 제한적인 일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 작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인생의 시기마다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유교와 사실상 통일성의 인종 정책이 겹겹이 쌓아 올린 나라이다. 때문에 운동보다는 공부가 우선이었고, 말보다는 생각을 우선하라는 문화가 내면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리 잡았다. 우리는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인종으로 자란 것이고, 다른 나라나 민족은 그들의 문화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들대로 교육받고 자란 인종이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우리의 성격은 스테레오 타입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지니게 되며, 서로의 민족 혹은 국가에 대한 문화를 미디어를 통해서만 알고 있더라도 대개 상대방에 대해 질문하면 대개 절반은 맞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화 된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누군가는 앞선 상황에서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인종 차별적 언행을 바꾸지 않는 비겁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당함에 마땅한 화를 내는 호걸이기보다는 싸움을 두려워하는 소인배였다. 그럼 그 인종적인 스테레오 타입처럼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을까, 아니며 그들의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인종적 스테레오 타입을 인정하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인정해야 할까. 


 “아시아인들이 다 그렇지 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그들이 원하는 인종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순하고 다툼을 싫어하는 아시아인처럼, 다만 제스처는 그들이 쓰는 대로 입을 삐죽이고 어깨를 들썩 올렸다. 그리고 그냥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만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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