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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Aug 16. 2020

인도 식당의 위생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도 식당으로 되돌아보는 우리의 지난 모습

“200 루피면 데려다줄게!”


“200은 너무 하잖아요. 70루피!”


“70이면 기름값도 안 나와. 150루피!”


 또 시작이었다. 기차역까지 100 루피면 간다는 말을 게스트 하우스를 나올 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 릭샤(오토바이가 달려 있는 작은 탈것) 기사는 시작부터 200루피를 불렀다. 좁혀지지 않을 듯 보였던 친구와 기사의 협상은 120루피에 기차역까지 안전하게 가기로 타결되었다. 며칠간 머무르는 동안 인도의 깊은 모습을 보여준 바라나시를 떠나기 위해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피곤할 만큼 돈을 깎은 탓인지 릭샤 기사는 운전하며 가다가 길거리 노점에서 씹는담배도 하나 사고, 지나가던 친구를 만나 멈춰 세우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저씨, 너무 느린 것 같은데요? 우리 기차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 어차피 인도 기차는 늦게 출발하니 절대 걱정하지 마.”


 기차 출발 시간 다가와 초조해진 우리는 빨리 가자고 재촉해 보았지만, 여유롭던 기사는 여전히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친구 휴대폰의 기차 예약 앱에는 아직 지연이나 연착이라는 표시 없이 정시 출발로만 나타났다. 늦은 건 우리인데 우리보다 더 여유를 부리는 모습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우리의 초조함을 알아챘는지 기사는 슬쩍 릭샤의 속도를 올렸다. 릭샤는 어지럽고 더러운 바라나시 도로를 논두렁 미꾸라지 마냥 순식간에 헤쳐 나가 어느새 바라나시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곧장 기차역으로 뛰어갔으나 역시나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세상이 좋아져 이제는 아무리 인도라 하더라도 이제는 기차가 언제 오는지 휴대폰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기차는 거북이 기어가는 속도로 오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도 우리 기차의 도착 시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플랫폼의 전광판에는 기차가 한 시간 늦게 들어온다는 의미의 붉은 점만 깜박였다.



 바라나시에서 타지마할의 도시인 아그라까지 가는 기차는 10시간이 걸린다고 표에 쓰여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속도면 14시간은 훌쩍 넘게 걸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육상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러 역을 나왔다. 뛰다시피 들어온 역이기 때문에 역사를 구경할 틈이 없었는데, 나와서 보니 드넓은 광장과 고가 도로와 구정물과 쓰레기로 더럽혀진 길거리가 보였다. 흑백 사진 속 오래전 한국을 보는 기분이었다. 넓은 광장에는 차와 소와 사람이 각자의 속도로 움직였고, 빽빽한 고가도로는 미세먼지로 어두운 이 풍경에 그림자를 더해줬다.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 거리에서 가장 환하게 불을 밝히던 식당을 찾았다. 길거리에는 이미 청량리역 앞의 포장마차 거리처럼 노점이 가득했지만, 반나절을 기차에서 버텨야 했기 때문에 혹여 탈이 날까 깨끗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장 대중적으로 먹는 메뉴인 팔락 파니르 (시금치와 인도식 치즈를 넣어 만든 초록색 커리)와 마크니 (버터와 토마토로 만든 진한 주황빛의 커리)를 주문해 두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화장실을 찾았다. 점원은 주방 뒤 계단을 가리키며 올라가면 화장실이 있다고 알려줬다. 점원의 말을 듣고 2층으로 올라가는데, 올라가는 계단이 미처 짓다 중단된 공사장 같았다. 붉은 벽돌에는 회색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라져 깨진 곳을 메우고 있었고, 손수 만든 것 같은 계단은 난간이 없어 아슬아슬했다. 벽에는 검은 때인지 곰팡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불분명한 형태의 무언가가 벽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인도를 오기 위해 잠시 일을 했던 아파트 건설 현장보다 정리가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화장실을 갔다 다시 계단을 조심히 내려오니 부엌이 정면으로 보였다. 계단과 다르게 황금색 타일을 해 두어 깨끗한가 싶어 자세히 바라 보니, 타일이 아니었다. 하얀 타일에 검은 손때와 누런 기름때가 달라붙어 굳어 있던 것이었다. 가스불 위에는 우리의 커리가 조리되고 있었는데 그 앞은 석탄보다 새카맣게 타버린 벽과 조리기구들로 멀리서도 쩐내가 나는 듯했다. 마치 2000년대 중반부터 유행했던 먹거리 X파일이나 소비자 고발 같은 프로그램에서 가방에 숨긴 카메라로 찍어야 하는 비주얼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린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광경이 비일비재했다. 지금은 거의 반도체 공장 마냥 무균에 가까운 살균을 하는 식당도 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식당 위생은 음식의 맛과는 별개라고 치부했다. 당시 분식집을 하셨던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정말 다른 세상이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경동시장에서 분식집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튀김을 튀기셨고, 아버지는 떡볶이를 포함한 나머지 메뉴들을, 어머니는 라면 같이 조리가 필요한 음식과 설거지 담당이었다. IMF가 터져 온 나라에 실직자가 넘쳤을 때, 식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사람들은 분식집으로 향해 식당은 매일 호황이었다. 메뉴도 많고 손님도 많은 식당에서 묵은 때를 벗기는 것이나 설거지, 청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으니 문제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젓가락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는 것은 다반사였고, 부엌에 들어가면 바닥은 미끄러웠고 기름 쩐 내가 가득했었다. 특히 할아버지가 담당하시던 튀김은 더욱 위생 관념과 동떨어졌다. 펄펄 끓는 기름과 수많은 손님을 상대하시던 할아버지는 담배를 태우시며 일하기도 하셨고(물론 튀김옷 입히는 과정이 아니라 튀김을 튀기는 동안) 태우던 담배를 마치 당구장이나 피시방처럼 기계 옆에 내려놓기도 하셨다. 지금 와서 그때의 이야기를 하시던 당신들은 그땐 그러고 살았다며 넘기셨다. 당시에는 많은 식당들이 그런 것에 큰 의문이나 문제의식이 없었고, 부모님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지금 내 눈 앞의 식당도 그들의 기준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가 바뀐 것이지 인도의 식당들은 인도인들의 시선에서는 큰 탈이 없었다. 그래서 식당 종업원들도 부엌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더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포토, 오케이? Photo, okay?”


더럽지만 자연스럽게 요리하는 모습이 신기해 사진을 찍어도 되냐 물어봤다.


“내 사진을? 당연하지!”


내 의도와 다르게 요리하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찍는다고 알아들은 요리사는 흔쾌히 수락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더러운 화구를 찍고 싶으니 나와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랑도 사진 한 번 찍을 수 있겠어?”


사진 찍히는 자세를 취한 요리사와 부엌을 동시에 찍고 고맙다고 하고 돌아서려 하니 이번에는 요리사가 나에게 사진을 찍자고 역으로 제안했다.


“형이 음식을 만들다 온 거야? 화장실 갔다가 왜 이리 늦게 와?”


“응? 아니, 그냥 요리하는 게 신기하길래 얘기 좀 하다 왔지.”


 사진을 찍고 돌아오니 친구가 나에게 왜 이리 늦었는지 타박을 했다. 차마 주방이 더러워서 구경하다 왔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잠시 후에 그 조리되던 음식들이 우리 식탁에 올랐다. 사진을 찍어주던 종업원은 엄지를 치켜세우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으며 맛있게 먹으라고 했다. 조리되어 나온 음식은 더러운 부엌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정갈하게 나왔다. 보지 않으면 깨끗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인도였다. 이것저것 따지려면 여행의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냥 친구에겐 모른 척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부엌 하나로 9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온 기분이었지만, 위생까지 따지다 보면 인도를 온 의미가 사라지기에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식당을 나왔다.


P.S. 사진을 첨부하고는 싶지만, 인도에서 함께 찍은 요리사 친구의 얼굴이 포함되어 첨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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