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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Nov 14. 2020

174만 원이 사라졌지만...

우울함에 시간을 도둑맞으면 안 된다.

 카드가 사라졌다. 그리고 카드 안에 있던 돈 174만 원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던 도중 어디선가 카드를 흘린 것 같다. 아니 소매치기를 당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대체 감이 잘 오지 않지만 카드와 돈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카드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후 카드 잔액과 인출 시간을 확인했다. 174만 원이  펫 샵이라는 이름을 통해 인출되었다. 러시아 루블로 환전하니 정확하게 10만 루블이다. 아무리 우리 집 강아지가 귀엽다고 한들 러시아로 여행을 와서 200만 원에 가까운 애견용품 쇼핑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카드가 사라졌을 때는 그래도 아직 사용하지 않았겠지, 정지하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항상 실현되었다. 174만 원이면 한 달 넘게 일해서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과 비슷했다. 돈 없는 가난한 여행자에겐 여행 경비의 절반이었다. 부랴부랴 카드 정지를 하고 나니 몸에서 힘이 빠졌다. 게스트 하우스 구석에 앉아 정신이 나간 채 멍하니 있었다.

(은행원의 말로는 카드 정지는 언제나 가능하지만, 해외 카드 부정 사용은 사건 발생 이후 3개월 이내에 한국에서 직접 신청해야 한다. 여행자 보험을 들어도 카드에 들어있는 돈은 현금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도움을 줄 방법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 부정 사용에 대한 신고를 접수하면 사건 조사를 하고 카드 부정 사용의 귀책사유가 나에게 없다면 돈을 돌려준다고 한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왜 하필 오늘따라 여행지에서 지갑에 대한 경계를 늦췄는지 후회, 경찰서를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려움, 피와 땀으로 모은 돈이 사라진 한탄. 그중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남은 돈으로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수중에 남은 돈은 다른 카드에 들어있던 200만 원과 현금 40만 원이 전부였다. 물가가 저렴한 동유럽 위주로만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에 허리띠만 졸라맨다면 여행을 마무리할 수는 있었다.


 카드 부정 사용에 대한 신고를 한국에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 경찰서에 신고하고 접수증을 받아야 했다. 정신이 반쯤 나갔지만 두려움을 안고 경찰서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던 러시아의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얄미웠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질까. 왜 나만 이라는 생각은 무섭게도 기억의 파동을 불러왔다. 기억 저 편으로 묻어두었던 썩 기분 좋지 않은 기억들도 떠올랐다. 좋고 행복한 기억들은 비슷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부정적인 생각은 나를 우울하게 할 온갖 생각들을 물고 왔다.


복잡한 생각들과 함께 경찰서에 도착했다. 사고 진정을 시도했지만, 자신들이 담당하는 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청이 받아지지 않았다. 아무런 소득 없이 경찰서를 나와 멍하니 보도블록에 앉았다. 문득 머릿속을 노래 가사 한 구절이 훑고 지나갔다. 


"Planet earth is blue, and there`s nothing I can do... 지구는 이렇게나 파란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네…”


 하늘이 이토록이나 파란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낯선 도시의 우울한 외지인일 뿐이었다. 여기 앉아 있다고 사라진 돈이 다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진 카드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속이 쓰리지만 일어나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하늘 높이 뻗은 높은기둥이 나타났다. 성 이삭 성당이었다.




 언제까지 우울해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남은 여행 기간이 아직 한참이었다. 우울함에 시간을 도둑맞으면 안 된다. 나에게는 아직 긴 여행 시간이 남았고, 보고 듣고 맛볼 세계가 남아 있었다. 내 삶에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걱정에 휩싸이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생겼지만 내가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고민한다고 풀어질 문제도 아니었다. 우선은 여기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즐기고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처리가 가능했다. 그러니 이제 걱정과 문제 해결은 여행 이후에 해야 했다. 그나마 모든 돈이 사라지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성 이삭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의 거대한 기둥 아래에 앉아 성당을 둘러보았다. 러시아에서 겪은 모든 일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처음 공항에 내렸을 때의 설렘, 사진으로만 보던 명소에 도착한 희열, 도시의 아름다움, 그리고 도둑맞은 카드와 돈. 여행의 희로애락이 모두 천천히 재생되었다. 삶이 파도와 같다면 지금 큰 파도 하나가 덮쳐온 듯했다. 큰 파도가 덮쳐 배가 흔들렸지만 지금은 다시 잠잠하다. 언제 또다시 파도가 올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잔잔한 바다라면 지금의 푸른 하늘을 즐기는 것이 파도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성당 한편에 마련된 양초에 불을 하나 지피고 촛대 위에 올려 두었다. 앞으로 어떤 파도가 올 지 모르지만, 그 파도가 덮쳐 오기 전까지 남은 여행을 즐기겠다는 다짐을 위한 촛불이었다.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우선 숙소로 돌아갔다.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골아떨어졌다. 오늘 하루 얻은 스트레스가 이제야 몸에서 터졌다. 잃어버린 돈에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짧은 잠을 자고 일어나니 벌써 저녁이 되어갔다. 사라진 돈을 걱정하며 침대에만 누워 있을 수 없으니 다시 도시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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