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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Dec 11. 2020

너무도 느린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성공을 이끄는 성취감

 그런 사람이 있다. 무엇이든 실패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 뭐든 성공할 것만 같은 사람. 인도 바라나시에서 만났던 그녀가 그랬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걸어온 길은 매우 달랐다. 각종 자격증에, 다양한 취미도 섭렵했으며, 남들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대기업도 자신과 맞지 않다고 과감하게 퇴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는 훌쩍 여행을 떠나 인도까지 오게 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무엇이든 시도하면 성공하는 사람이었다. 공부면 공부, 연애면 연애, 취미면 취미. 그녀의 도전은 성공이 당연해 보이는 길이었다.


 멋있어 보였다. 나이도 나와 큰 차이가 없었는데 벌써 삶에서 이룬 성과가 가시적으로 보였다.  그 성과는 그냥 운 좋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절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흔히들 말하는 하루를 25시간 사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완벽해 보이는 그녀와 대화를 거듭할수록 내 자신은 점점 더 초라해 보였다.


 어느 새부터 나는 한국이 나를 위한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꾸준한 노력 없이 중간에 멈춰 서게 되면 도태되어 버리는 사회로 느껴졌다. 붉은 여왕 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온 역설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계속 뛰어가고 있음에도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못해 의문을 갖는다. 그러자 붉은 여왕이 “너는 참 느린 나라에 사는 구나. 이 공간에서는 같은 공간에 있으려면 뛰어야 해. 다른 곳으로 가려면 2배로 뛰어야 하지.”라고 말한다. 모두가 빨리 변화해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노력했다고 생각해도 제자리인 현상이다. 모두가 함께 노력하고 변화하고 있기에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끊임없는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 동시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조차 놓치지 않는 사람들로 느껴졌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 모두 뛰고 있지만 나만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살지 않는 나는 사회에서 뒤쳐진 사람이었다. 자격지심일 수도 있었다. 남들만큼 열심히 살지 않은 나의 자격지심. 가끔은 나도 열심히 살지 않았나 스스로 생각해 보지만 그녀와 같은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전혀 아니었다.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시도는 했었고, 그렇지만 자신감 있게 노력했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정도일 뿐이었다. 여왕의 나라에서 나는 뛰는 인간도, 멈춘 인간도 아닌 기어가는 인간이었다. 앞으로 가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는 허비하지만, 나아가지 조차 않고 뒤로 점점 밀려나고 있는.


 노력하는 자가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공식이다. 그리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보다 더 잘 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헌데 저들에게 뒤쳐진다는 암울함보다 궁금한 건 어떻게 뛰어가는 저들은 멈추지 않는 노력을 할 수 있는지 였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는 노력하기 위한 집중력이 더욱 없어진 기분이었다. 무언가 하려고 해 봐도 유튜브나 인터넷에 빠져 하루를 날리기 일쑤였다. 특히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가 지나가면 절망감만 가득했다. 때문에 나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나 같은 사람은 사회라는 궤도에서 도태되어 점점 침몰하는 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쳐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를 살아도 지쳤다. 방전된 배터리처럼 멍한 기분이었다.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은 하루들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남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감흥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친구들이 괜찮다는 말을 해도 무덤덤했고, 부모님이 아직 괜찮다고 하셔도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혹은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들어도 공감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보이지 않고, 안정에 대한 불안만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내가 살아온 인생 전체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가끔 사람들이 점을 보는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인생의 풍파를 견디면 “언젠가” 좋아지는 때가 있는데 그게 “언제”인지 알고 그 때까지 버티는 희망을 얻고 싶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푸념과 한탄 섞인 말을 할 시간에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하면 되면 된다. 100명 중 한 명이 통과하는 시험이나 취업문이 있다면 그 한 명이 되면 된다. 개미처럼 일만 하느라 다른 노력을 하지 못하는 인생이면 남는 시간에 스스로를 계발해서 가치를 높이면 되는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이다.


 매일 휴대폰만 보다가 하루가 지나고 결국 한탄하는 삶인데 당장 내일부터라도, 아니면 오늘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산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될 리가 없었다. 노력에 대한 동기 부여가 없었다. 절박함이 노력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에게 절박함은 오히려 포기를 불러왔다. 그보다 내가 필요한 것은 성공의 전율, 성취감이다.


 생각해보면 지난 수 년 동안 성취를 느낀 경험은 너무 드물었다. 아니 인생을 곱씹어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성취감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해보지는 못한 듯 했다. 대학교도 목표로 했던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며, 회사도 원하는 곳에는 지원서조차 내기 두려워 피했었다. 연애도 이렇다할 성공이 없었다. 성공의 성취감보다는 시간이 지난 해방감에 의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노력으로 성공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의 원동력은 성취감이었다. 성취감은 노력의 끝에 있는 보상이다. 노력으로 한번 성공을 경험하면 성취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생긴다. 난 뭘 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거대한 기계 장치가 만들어지고 처음 움직일 때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한번 거대한 톱니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면 이전보다는 수월하게 움직이듯 이 자신감은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에게 힘을 준다.

혹여 새롭게 도전한 길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더라도 성공을 경험해 본 사람은 노력은 결국 끝이라는 목적지를 알고 있다. 나는 성공을 위한 노력의 끝이 있는지조차 몰랐고, 언제 이 힘든 고난이 끝나는지 알지도 못했다. 때문에 언제나 이 방법이 맞는지, 혹은 이 길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헷갈리고 불안해하다 포기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런 성취감을 한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노력의 끝에 있는 보상을 알고 있기에 당장 한 걸음이라도 더 걸을 원동력을 얻는다. 벽을 뛰어 넘는 성취감은 중독적으로 다음 성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또다시 노력하게 된다.



 성취감을 전혀 느껴보지 못한 나는 그럼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가야 할까.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 탈출하지 못해 뒤로 밀려나고 있는 내게 필요한 것은 결국 위로다. 남이 진심을 담든 겉치레로 하든 하는 위로가 아닌, 내가 나에게 주는 위로가 필요하다.


 나의 삶에 대한 평가도 결국 내가 한다. 그동안의 낭비해버린 하루에 대한 자괴감으로 살아온 길에 대한 평가도 결국 내가 한다. 그러니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한다. 우울한 비관에 빠져 있는 나를 달래는 남들은 어차피 큰 위로를 해 주지 못한다. 공허한 위로일 뿐이다. 어줍지 않은 충고나 안 하면 다행일 수 있다.


 그러니 우선 그동안 빠져 있던 늪지대 같은 하루를 살던 나를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제 일어서 봐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뒤집기를 하고, 엎드리고, 기어가고, 무언가 잡고 일어나듯이 나도 한 단계씩 움직여야 한다. 작은 목표, 하루를 성공적으로 살기 위한 목표부터 세워보고 성취감이 대체 어떤 기분인지 느껴봐야 한다. 남들에게는 사소해 보일 지 몰라도 나에게는 성취를 느끼게 해 주는 첫 단추이자 눈덩이이다. 시작은 작은 눈덩이 일지라도 점차 굴리다 보면 커져 나갈 것이다. 그러니 거대한 목표의 성공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작은 목표부터 정해본다. 그렇게 성취를 이뤄나가다 보면 언젠가 삶이 조금은 빛나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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