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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Aug 05. 2021

게임중독과 여행과 도피

즐거움이 사라진 여가는 목적을 잃을 화살에 불과했다

한동안 게임에 빠져 살았다. 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10시간 넘게 게임을 했다. 간간히 시간 날 때 심심풀이로 하던 게임이 아닌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빠졌었다. 요즘 세상에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지만, 이렇게 현실도 내팽개치고 게임에 빠진 경우는 흔치 않다. 나에게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게임을 할 수 있나 싶도록 했다. 아침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낮 12시에 눈을 떠서 게임을 켰다. 게임을 켜면 친구 중 누군가 이미 접속해 있는 상황이었다. 대충 눈곱만 지우고 바로 현실을 떠나 쏟아지는 몬스터를 사냥하고 새로운 지역을 탐험하고 어떻게 하면 더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른 친구들 역시 들어왔다. 우리는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주야장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게임을 하며 틀어 둔 음악이 몇 번이나 바뀌고 난 이후 시계를 슬쩍 보면 벌써 5시간이 지나 있고, 걱정할 틈도 없이 다시 게임에 빠져 있다가 시계를 보면 새벽 4시였다. 너무 오래 했나 싶으니 침대로 기어 들어가 잠에 들고, 잠든 꿈속에서도 게임하는 꿈을 꾸다 다시 눈을 뜨면 12시였다.


재밌는 게임이긴 했다. 게임을 좋아하긴 했지만 줄곧 재밌는 게임을 찾지 못해 게임 권태기를 느끼고 있던 시점에 발견한 최고의 게임이었다. 하지만 재미는 잠깐이었다. 며칠 동안 즐기던 게임은 이내 재미가 시들해졌다. 그래도 게임을 놓지 못하고 눈 뜨면 게임에 다시 접속했다.


어릴 때 뷔페에서 잔뜩 먹고 배가 부른데도 억지로 입에 욱여넣는 기분이었다. 맛있게 먹고 그만 두면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텐데 굳이 계속 배를 채워 목구멍까지 음식을 채우고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보다 재미는 훨씬 떨어졌지만 게임 속 세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현실에 쌓아 둔 일이 산더미였지만 게임으로 도망친 탓이었다.


그래도 게임에 빠져 있는 동안 게임은 내게 현실이었다. 참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도전에는 언제나 보상이 뒤따랐고, 힘든 고통을 극복한 이후에는 도파민이 분출되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지루한 일상과 달리 현란한 볼거리가 가득했다. 




현실은 게임보다 즐겁지 않은 세상이었다. 해야 하는 일은 많고, 하기 싫은 일도 쌓였다. 확실한 보상이 있는 경우도 드물었고, 무언가 성취한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더욱 드물었다. 재미있는 일도 드물었다. 사실 그렇다고 게임을 하기 전에 현실에서 열심히 산 건 아니었다. 게임이 아니라면 여행을 떠났다. 나를 억누르는 다양한 감정들이 나를 잡아먹는 기분이 들 때,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지만 외면하고 싶을 때 혹은 다른 어떤 이유라도 뭔가 도망치고 싶을 때 언제나 선택한 쥐구멍은 여행이었다. 재미없는 현실과 다르게 여행은 매일이 새로운 자극이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현실의 고민이 나에게 들이닥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구경을 해야 했다. 밤이 되어 숙소에서 조용한 침묵과 함께 할 때는 낮에 지나친 현실의 걱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최소한 낮의 다채로운 풍경 속에서는 자유로웠다.


처음 게임을 즐길 때 느끼던 새로운 세상의 환상이 매일 아침마다 펼쳐졌다. 꿈이 필요 없는 꿈속 세상처럼 여러 고민으로부터 도망치려면 언제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넘쳐났다. 하지만 도망치듯 떠난 여행의 흥미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처음의 신기함과 색다른 감정들은 사라졌다. 이제는 여행을 하는 도중에도 한국에 돌아가 밀린 일을 해야 한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러면서 여행을 하면서도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여행을 끝내지 못했다. 그냥 그러고만 있었다.


게임에 빠진 것과 여행의 궤는 같았다. 도망치듯 들어가서는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더 도망칠 구석을 찾았다. 처음의 재미는 이미 반감되었다. 게임이나 여행이나 혹은 여타 중독되는 모든 행동은 마찬가지다. 중독은 그 자체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도망칠 곳 없는 이들의 도피처였다.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순간 게임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빠져 피폐해진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여한 가지였을 것이다.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걸 안 이후에도 버릇을 고치진 못했다. 여전히 그 세계 속에 빠져 있었다. 나가는 길은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새벽 내내 빠져 있던 게임을 벗어난 건 어느 날씨 좋은 아침이었다. 이날도 새벽까지 아무런 생각 없이 게임을 했다. 유달리 햇빛이 강한 어느 날 커튼 사이의 틈을 아침 햇살이 뚫고 들어와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찍 눈을 뜬 만큼 피곤함은 배로 몰려왔다. 카페인의 강한 힘이 필요했다. 이왕 눈 뜬 김에 집 앞 카페로 가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뽑았다. 물감으로 칠한 듯 맑은 하늘과 눈부신 햇빛, 그리고 차가운 커피 덕분에 정신이 좀 들었다.


정신이 들고 나니 여행이 가고 싶어 졌다. 도망치듯 떠났던 여행이 아닌, 즐거운 여행. 즐기고 싶은 여행.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여유로운 여행이 하고 싶었다. 게임도 여유롭게 여가를 즐기기 위해 해야 했다. 성취와 보상의 도파민 분비를 즐기고, 자극적 쾌락이 아닌 흥미를 느껴야 했다. 여행이나 게임이나 그래야 했다. 즐거움이 사라진 여가는 목적을 잃을 화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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