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성 Aug 07. 2021

오케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어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슬프지만,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뭐

모든 일이 계획대로 움직일 때 나오는 쾌감이 있다. 날짜, 일정 , 시간을 일일이 계획해두고 그 계획에 맞게 움직이는 상황을 바라보면 마치 수많은 톱니바퀴가 완벽히 일치해 서서히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다. 나 스스로가 계획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 내가 세운 계획이 차근히 실행되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 흥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언제나 계획은 완벽한 상황을 상정한다. 초등학생 때를 생각해보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씻고 밥 먹고 공부하고, 잠깐의 휴식을 가지고 점심을 먹는다. 식사 후에는 학원을 갔다가 다시 집에 오면 복습하고, 저녁 식사 시간 전에 자유 시간을 가지고 다시 저녁을 먹고 난 이후에는 숙제를 하고, 자유 시간을 가지고 꿈나라로 간다. 세세한 시간은 다르더라도 언제나 방학 계획은 이렇게 완벽했다. 하지만 언제나 완벽한 계획들은 틀어지기 마련이다.


하루라도 방학 계획에 맞게 살면 성공한 방학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이런 실패들은 초등학생 때 끝나지는 않았다. 이후 치러진 수많은 시험 기간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계획을 잡아 두었지만 성공적으로 끝난 기억은 거의 없다. 시험이 있기 전부터 주 단위로, 일 단위로, 시간 별로 계획을 잡았지만 언제나 할 일을 마치지 않아 오늘 할 일이 내일로 미뤄지기 일쑤였다. 하염없이 놀다 며칠 밀린 일정을 마주하면 이런 일정을 계획한 과거의 나를 원망하기도 하고, 알면서도 하지 않는 현재의 나를 자책하기도 한다.


반대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획이 틀어지는 경우도 있다. 대학생 시절 나는 영화 제작 동아리를 만든 적이 있었다. 영화는 1분 1초가 모두 돈이다. 카메라부터 각종 장비, 배우 섭외비, 장소 대여료 등 아무리 아마추어가 찍는 영화라고 하더라도 예산은 생각 이상으로 투자되었다. 때문에 돈이 부족한 대학생의 입장에선 최대한 계획을 철저히 짜 두어야 했다. “아쉽게도 오늘 이 장면 찍지 못했으니 내일 찍어요~”라는 말은 없었다. 내일은 내일의 분량이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 한 장면을 다시 찍기 위해서 재투자되는 비용은 기존의 투자된 비용만큼 필요했다. 때문에 촬영 계획은 어린 시절이나 시험 기간의 일정처럼 지키지 못하면 자책으로 끝나는 계획이 아니었다. 준비에 들어간 노력, 시간, 돈 그리고 스탭 모두를 책임져야 했기에 계획은 더욱 철두철미 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계획이 틀어지는 경우가 생겼다. 어떤 사고는 충분히 대비하면 막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건들은 마치 벼락에 맞는 것처럼 너무나 천재지변처럼 예상치도 못하게 일어나곤 했다. 한 아파트에서 촬영을 할 때였다.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에게 협조를 받고 시간 약속까지 받았다. 오전에 촬영을 마치고 아파트로 향했는데, 관리사무소에서 촬영 장비를 들고 움직이는 우리를 막아섰다. 분명 며칠 전 촬영을 하기로 했다고 약속받았다는 말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촬영 전 우리와 약속했던 경비원이 다른 경비원들에게 그 약속을 전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심지어 당일 비번이라 나오지도 전화를 받지도 않았기에 우리도, 경비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은 교통사고에 당한 기분이었다.




삶이 예측 불가하니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이렇듯 언제나 계획은 틀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여행에서도 세워둔 계획은 언제나 어긋났다. 특히 여행을 갈 때 즐거운 상상을 하며 세운 계획이 무너지면 실망이 더욱 커진다. 보통 여행을 가게 된다면 시간과 돈을 들여 떠난 여행인 만큼 하고 싶고 보고 싶은 일이 많으니 계획을 철저히 세워 두는 편이다. 특히 누군가와 함께 가게 된다면, 뭔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더 착실히 세운다.


친구들과 방학을 맞아 일본 오사카로 떠났을 때도 일주일치 계획을 모두 혼자 세웠다. 물론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혼자 이렇게 계획을 짜는 걸 좋아하기도 하니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첫날 오사카에 대해 슬쩍 맛을 봤고, 둘째 날에는 오사카 근교에 있는 맥주 공장을 견학 간다는 일정을 잡아 두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맥주라 우리끼리 술 한 잔 할 때 빠지지 않는 맥주인지라 모두가 흥미를 보였다. 조주 하는 과정도 볼 수 있고, 맛도 볼 수 있으니 신선한 맥주를 상상하며 우리는 공장으로 떠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의 복잡한 지하철을 마주하자마자 우리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국철과 사철의 운영 주체가 달라 역 안에서도 갈아타야 했고, 일본어를 읽을 수 없으니 가는 길도 헤매야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왜 한국 대중교통이 편하다고 외국인들이 극찬하는 지를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공장 견학의 예약한 시간이 지나버리고 지하철에 지친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 떨어지고 말았다. 교외의 이름 모를 지역은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역에서 나오고 보니 바로 앞에 재래시장이 있었다. 여행 온 외국인이 갑자기 마석 오일장 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이랄까. 계획이 틀어진 슬픔보다 분노가 먼저 차올랐다. 이렇게 복잡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움직일걸, 가는 길을 미리 알아두고 물어서라도 갈걸…. 기대가 컸던 만큼 회한도 커졌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다시 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오랜 시간 지하철에 있던 만큼 배도 고파졌다.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서로 누가 먼저 화를 내야 할까 말까 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가지 못한다는 전제는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관광지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서 뭘 해야 할까,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오늘 하루는 뭘 하고 놀아야 할까 라는 질문을 서로 머릿속에서 되뇌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으니 밥이라도 먹기 위해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일본어를 읽지도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우선 들어가 식당이라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과 다른 듯 닮은 일본의 시장은 생각보다 신기했다. 일본어로 되어 있지만 익숙한 향기가 났다. 어디선가 우리 할머니가 장을 보고 있을 듯 해 보이는 야채 가게부터, 이름 모를 고소한 향기를 풍기는 길거리 음식, 각종 보세 의류를 줄줄이 널어 둔 옷가게,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파는 화장품 가게들까지. 자고 나란 땅에 있던 시장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우리가 만나던 일본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잘 꾸며두고 포장한 장난감 같던 일본은 TV나 인터넷에서 많이 만나 이미 친숙한 광경이었다. 맛있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음식을 다시 맛보는 기분과 비슷했다. 오히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했다. 하지만 새롭게 만난 교외의 작은 시장은 정반대로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보여줬다. 흔히 만나는 관광지의 일본이 아닌,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진짜 일본이었다.


시장을 둘러보던 우리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일본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던 골목 식당이었다.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일본식 카레와 맥주를 주문할 수는 있었다. 계획대로 공장에서 마셔야 하는 맥주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기분으로 만나는 시원한 맥주 역시 깔끔하고 상쾌했다. 

물론 계획대로 맥주 공장을 갔더라도 좋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새로 만난 진짜 일본이 최고고 원래 가려고 했던 일정은 별로였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 이상의 흥미로운 상황은 계획이 틀어져야 만날 수 있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슬프지만,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뭐 조금은 괜찮지 않나 싶다. 여행은 내 발이 닿는 곳이 새로운 곳이니 언제나 다른 길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사실 인생도 다른 길은 존재한다. 영화 촬영 계획이 틀어졌던 과거의 나도 결국 주변을 뛰어다녀 다른 좋은 장소를 만났다. 원래 담으려던 아파트 골목보다 더욱 탁 트인 이 공간은 계획을 짤 때는 생각하지도 않던 장소였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순간의 당황은 존재하지만, 언제나 모든 길이 일방향인 건 아닌 덕분에 새로운 방향을 잡으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다. 애당초 계획이 최고의 선택이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최선의 상황을 상정한 것일 뿐 무조건적인 선택은 아닐 수도 있다. 때문에 계획이 망가졌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 고민해보면 어디선가 새로운 길이 나타날테니까. 정 그래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슬프다면 세상에 계획대로 되고 있는 건 마미손뿐이라 생각해보자. 얼마나 계획대로 되고 있기에 노래까지 냈을까. 우리의 계획은 노래를 부를 정도로 완벽한 계획이 아니니 실패할 수도 있는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중독과 여행과 도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