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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Aug 10. 2021

고립된 비행기 속에 혼자

자발적으로 고립된 승객들

몇 번이나 비행기를 탔지만 출발하기 위해 기체의 거대한 진동이 울리면 설렌다. 촌티내지 않으려고 짐짓 설레지 않은 척 무표정으로 의자에 머리를 기대 앉아 있지만 슬쩍 샛눈으로 창문을 본다. 재채기와 사랑을 숨길 수 없듯이 설레는 표정 또한 숨길 수 없다.


이륙 전 마지막으로 휴대폰에 밀린 메일과 메시지를 정리하고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이제부터 한동안은 바깥 세상과 단절된다. 남들에게 연락이 오는 걸 걱정할 필요도 없지만 반대로 심심해서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일도 금지되었다. 옆 자리에 있는 이름 모를 아저씨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이 완벽하게 혼자다. 이런 상황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마치 산 골짜기에 있는 작은 절에 혼자 있는 그런 상황 말이다. 외로움이 좋은 건 아니지만 너무 복잡한 세상을 무 자르듯 잘라내고 혼자 있고 싶었기에 이런 단절이 반갑다.


곧 이어 거대한 비행기가 육중한 소음을 내며 천천히 내 몸을 뒤로 밀어내면서 출발한다는 신호를 온 몸에 전달한다. 서서히 창문 밖 잔디밭이 뒤로 밀려나는 듯 보인다. 비행기만큼 여행에 대한 설렘을 북돋아 주는 게 또 있을까. 


온 몸의 세포가 순간적으로 강한 압박을 받는다.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솟구치기 위해 힘을 꽉 준 비행기의 기수가 올라갈수록 귀가 멍해진다. 모든 승객들을 강하게 짓누르는 중력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중이라는 뜻이고, 이제부터 비행기 안과 밖은 완전히 단절되어 격리되었다는 뜻이다.


비행기는 지상을 벗어났지만 하늘을 부유하는 연옥이다. 이미 죽었지만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남은 죄를 씻기 위해 버티는 연옥. 비행기 안에 있는 나 역시 이미 한국을 떠났지만 여행지에는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버리고 오지 못한 걱정과 여행의 기대감의 복잡한 심경으로 아련히 창문만 쳐다본다. 이미 누군가와는 완전히 차단된 상태지만 나에게 집중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런 상황이 반갑다. 나만 나에게 집중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올 연락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쉴새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어지럽지도 않다.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다는 고립되었지만 외롭지 않은 순간이다.


나에게 집중을 하던 못하던 상관없이 비행기는 고고하게 하늘 위를 날아간다. 아직 땅에 있는 현실의 걱정이 가득한 나와 다르게 비행기는 땅과는 완전히 멀어졌다. 오직 관제탑과 연락하는 조종사만 땅과 연결되어 있고, 기내의 승객들은 모두 완전한 고립에 들어섰다. 이제는 땅 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른다. 우리가 하늘에 있는 사이 지구가 갑자기 멸망해버려도 승객들을 알 길이 없다. 물론 비행기가 떠 있는 수 시간 내 천재지변으로 지구가 멸망한다면 하늘에서도 망해가는 지구의 모습이 보이긴 할 수도 있겠다.

영화 <터미널>에서는 진짜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지만, 나라가 망해버려서 여권이 정지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인 빅터 나보스키가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는 동안 그의 고국인 크라코지아에선 쿠데타로 인해 내전이 일어났다. 비행기에서 육지의 상황과 완벽히 차단되었던 나보스키는 이런 사실을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당연하게 공항에 내려 입국 심사를 받는데, 모든 크라코지아의 여권이 정지되어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나보스키의 비자 또한 취소되었다. 나보스키는 비행기에서 내렸을 뿐인데 공항을 빠져 나갈 수도, 다시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진다.


영화는 공항에 도착한 이후의 일을 다루기 때문에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나보스키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자신이 알고 있던 크라코지아에서 출발하는 나보스키는 비행기를 타고 자발적 고립의 상태로 들어간다. 나보스키 뿐만 아니라 비행기를 타는 우리 역시 육지와 모든 연이 끊기는 고립된 장소에서 고요한 비행을 즐긴다. 예정된 비행이 끝나면 다시 우리가 알고 있는 육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행공포증을 가진 몇 몇 사람들은 비행 중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대개는 당연히 영원할거라 생각하는 지구의 품을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 덕분에 자발적인 고립을 즐긴다. 그리고 다시 자유의지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믿음과는 다르게 나보스키의 고립은 이어졌다. 이번에는 반대로 비자발적인 고립 상태다. 비행기 공간이라는 자발적 고립에서 나와 공항에 도착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나보스키는 모든 정보가 통제되면서 왜 공항에서 벗어나면 안되는 지 알아 듣지 못하면서 비자발적으로 고립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의 나라가 어떤 상황인지, 내가 왜 공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심지어 의식주의 해결 조차도 어떻게 하는 지 모른다. 공항 안에 모든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 크라코지아의 내전, 공항 직원과 대화하는 방법, 계산하는 방법 등을 나보스키만 모르고 있다. 영화가 진행된 이후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긴 하지만 비자발적 고립에 빠진 나보스키는 선택지가 없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나보스키를 연기한 톰 행크스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도 자발적 고립의 안전에 대한 믿음을 배신 당한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비행기는 추락했고, 톰 행크스만이 살아남아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 <터미널>에서나, <캐스트 어웨이>에서나 주인공들은 비행기라는 자발적 고립에서 비자발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고립이 두려운 건 이런 자발적 고립의 상태가 아닌 나의 통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비자발적 상태의 고립이다. 출발과 도착이 예측 가능한 비행기 안에서의 고립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지친 내게 주는 일상의 도피로 여행 전후 잠시 쉬는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항이나 무인도에 그것도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갇힌다는 상상은 힘들다. 같은 곳이라도 공항에서 일주일동안 살면서 글을 썼던 알랭 드 보통이나 무인도에서 자연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를 싣고 나르던 비행기는 어느새 도착지 근처에 도달했다. 창문 밖 흰 구름만 가득하던 풍경은 어느새 푸른 잔디와 도로로 꽉 차 있다. 땅과 다시 만나면서 다시 벗어났던 다양한 감정들을 재회한다.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 덕분에 다시 처음에 느꼈던 강한 압박이 귀 안쪽 깊은 곳을 눌렀다. 이제는 이런 멍해지는 순간들이 고립된 공간 속으로 드나들기 위한 예방주사 같다.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으며 전해지는 쿵 하는 진동과 함께 비행기 굉음이 울린다. 현실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굉음으로 된 오케스트라다.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승무원의 싸인이 내려지고, 사람들은 고립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내 삶은 영화가 아닌지라 나 역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분주하게 짐을 챙기는 사람들의 손에는 수 많은 알림 메시지가 오간다. 자발적 고립에서 벗어나게 된 나도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켜고 밀린 메시지들을 확인한다. 다만 비행중이었다는 밀린 답장들을 보내고 ‘여행중이라 연락이 잘 안될거다’라는 변명으로 다시 즐거운 고립 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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