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성 Aug 18. 2021

구리시의 가지 포스터를 붙이던 할아버지

여행을 알려준 할아버지

구리시에는 특별한 포스터가 있다. 노란색 바탕에 가지 하나가 그려져 있고 “사랑해요”라고 써 있는 포스터다.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도 광고도 찾을 수 없어 키스 해링이나 뱅크시의 작품처럼 현대미술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후미진 골목에 여러 개씩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 거리예술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포스터는 불법 홍보물을 가리기 위해 시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포스터다. 허름한 벽에 부착되어 있는 나이트클럽이나 불법 도박 홍보물을 떼 내야 하는데, 떼 내면서 찢어지거나 애매하게 흔적이 남으면 오히려 더 흉물스럽기 때문에 그 위에 가지가 그려져 있는 포스터를 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포스터는 시에서 실행한 실버 재채용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우리 할아버지를 포함한 노인분들이 걸어 다니시다 거리에 부착되어 있는 불법 홍보물을 발견하시면 그 위에 가지 포스터를 덮어 씌웠다. 걷기를 좋아하시던 할아버지에겐 안성맞춤인 일자리였다.


내가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순간부터 할아버지는 언제나 걸어다니셨다. 걷지 않으시면 자전거를 타셨다. 할아버지는 나그네였다. 역마살이 낀 사주였는지 방랑벽을 버리지 못하셨다. 그런 할아버지 덕분인지 때문인지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은 평생 이사를 다녔다. 아버지는 훗날 모든 이사들은 방랑벽 때문이 아니라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할아버지의 그런 성격도 큰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할아버지는 매일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시면 저녁 식사 전까지 집 밖에 계셨다. 청량리를 가시기도 하셨고 기운이 좋은 날에는 종묘까지 가기도 하셨다. 가끔 한강 이남으로 가시기도 했다. 구리시와 붙은 서울 동부권에 할아버지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나도 그런 할아버지를 따라다녔다.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약수터까지 같이 걸어가 그 무거운 약수를 메고 왔다. 쫄래쫄래 따라가던 나도 페트병 하나에 약수를 담아 할머니께 자랑했다. 유치원이나 학교를 가지 않던 방학에는 함께 시내에 가거나 청량리에 함께 갔다. 10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갔다는 것이 믿기지는 않지만 힘들었다는 기억은 없었다. 나야 어린 몸이었으니 언제나 싱싱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노년의 몸을 가진 할아버지는 어떻게 그 거리를 다니셨는지 모르겠다.


집에서는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의 모습을 하시며 오로지 “밥 묵자” 한 마디밖에 하지 않으시던 할아버지는 밖에 나서면 말이 많았다. 궁금하게 많던 어린 손주에게 대답하기 위해서 말이 많으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 안의 할아버지와 집 밖의 할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나와 걷던 할아버지는 아는 것도 많고 말도 많은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가 집 밖에 나가시고 나면 엄마와 할머니가 가끔 부엌에서 할아버지를 무뚝뚝한 경상도 노인네 라고 말하곤 했지만 어린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쭈글쭈글해진 손을 잡고 걸어 다니면서 “이건 무슨 꽃, 이건 무슨 풀” 이라 하면서 설명해주는 할아버지는 선생님도 되었고, 높은 산을 등산할 때는 앞장서서 가는 모험가도 되었다. 함께 장기를 두거나 그림을 그릴 때는 좋은 친구였다.


매일마다 함께한 할아버지와의 여행은 내가 학원을 들어가면서 끝이 났다. 손주와 함께 갈 수 없어 할아버지는 섭섭했을 수도 있지만, 다행히 그 이후에도 꾸준히 돌아다니셨다. 이후에 할아버지 댁과 분가를 했지만 우리 집과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알게 모르게 닮은 아버지 덕분에 몇 번의 이사를 반복했지만 거진 할아버지 댁 근처였다. 덕분에 할아버지 댁에 가지 않아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함께 돌아다니던 예전만큼의 추억은 쌓이지 않았지만, 종종 찾아가는 것 이외에도 길에서도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길에서 마주치면 언제나 반가웠다. 빠르게 자라는 나와는 다르게 천천히 세월을 타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노인정 앞 마당에서 장기를 두실 때나, 홀로 걸어서 어딘가로 가시는 모습을 볼 때나 그대로였다.


실버 채용으로 불법 포스터를 지우는 일을 하셨을 때는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서울로 나가시던 할아버지는 저 일을 하신 이후부터는 동네에 주로 계셨다. 지나가다 가끔 마주치면 할아버지는 항상 포스터 뭉치를 들고 동년배 친구분들과 어딘가로 걸어 가시고 계셨다. 걷기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말년에 찾은 천직이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보고 소리치며 달려가 안기며 할아버지에게 기운을 얻곤 했다.


할아버지와의 추억 덕분인지 아니면 할아버지를 따라 끼어 있는 역마살 때문인가 나 역시 가만히 있는 생활을 하지 못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집 밖으로 싸돌아 다니는 건 당연하고, 국내로 해외로 여행을 멈추지 못한다. 특히 떠나서 언제나 걷기를 멈추지 못하는 내 모습은 할아버지의 판박이였다. 걸어 다니며 변하는 풍경, 나를 제외하곤 분주한 거리의 사람들, 우연히 만났지만 색다른 식당을 발견하는 재미. 여행이 주는 이런 총천연색의 세상을 깨달은 건 역시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혼자 여행을 온 오늘도 하루 끝까지 걸었다. 여행 중에도 걷기는 멈추지 못한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혼자 걷기만 한다. 숙소 골목부터 시작해 걷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다시 걷고, 새로운 길이 나오면 또 다시 걸었다. 자박거리는 발자국 소리의 즐거움, 새로운 풍경의 신비함,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법 이 모든 건 할아버지로부터 나에게 이어져온 유지였다. 그러니 집에서는 말 한마디 없는 ‘경상도 노인네’였을지라도 나에게 만큼은 거대한 할아버지였다. 이슬 맺힌 추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 추억으로부터 뿌리내린 기쁨이 나를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가지 포스터를 붙이는 일을 하던 도중 폐암 선고를 받으셨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남은 삶을 정리한다고 말씀하셨지만, 하루가 다르게 할아버지의 몸은 말라가다. 걷기도 힘든 몸상태가 되니 포스터는 커녕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셨다. 평생을 매일 같이 밖으로 걸어 다니다 집안에만 머무르게 되니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동네에 오래된 골목을 지나가다 반듯하게 붙여진 가지 포스터를 다시 만났다. 할아버지가 붙인 포스터라기엔 너무 새 것 같았다. 당연히 그런 동화 같은 일은 없었다. 그래도 아련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선가 포스터를 붙이며 뒷짐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뒷모습을 상상하니 할아버지의 얼굴, 눈동자, 목소리 모두 기억났다. 특히 그 뜨겁고 주름 잡힌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던 온기가 떠올라 나는 주먹을 꼭 쥐고 말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립된 비행기 속에 혼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