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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Sep 05. 2021

무대의 주인공이 된 베이스

내 시선 속 주인공은 나

혼자 여행을 가면 보통 게스트 하우스에 묶는다. 호텔처럼 좋은 숙소에 큰 관심도 없고, 숙소는 단지 잠만 자는 곳이라 생각해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물론 남들이 코를 골아도 잘 잘 수 있고, 길바닥에서도 가끔 졸 수 있을 정도로 무던한 성격인 덕도 있다. 그리고 혼자 여행하게 되면 밤을 지새우기 심심하니 게스트 하우스에서 묶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나름 재밌다.


모스크바의 게스트 하우스 역시 그런 곳이었다. 여행자들 뿐만 아니라 일하러 모스크바에 들린 사람이나 학생들도 살고 있었다. 일종의 고시원 같은 역할이지만 나름 자유성이 조금 있는 곳이랄까.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며 서로에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심심하면 놀러 온 여행자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곳에서 만난 A 역시 일 하기 위해 잠시 모스크바에 들린 친구였다. 두 달 정도 체류해야 하는데 호텔은 비싸고 그렇다고 집을 구할 수는 없으니 게스트 하우스에 있던 것이었다. 해가 저물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거실로 조금씩 모이며 조용히 자기에게 집중하던 시간이었다. 나도 노트북을 들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A는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곤 한글로 이것저것 검색하던 내 화면을 보고는 한국에 가 본 적이 있다며 말을 걸었다. 




A는 밴드에서 베이스를 치는 베이시스트였다. 물론 유명한 밴드가 아니라 직업은 따로 있었다. 어떤 직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돈을 버는 직업보다는 음악가로의 정체성이 더욱 확실했다. 밴드 역시 유명한 밴드는 아니었다. 인디 밴드 중 인디 밴드였다. 개러지 밴드라고 불리는 그런 밴드의 베이시스트였다. 그런 밴드면 취미가 아닌가 싶었지만, 자기들 노래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래도 마을에 있는 술집에서 연주하고 출연료를 받는 정도의 세미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밴드였다.


베이시스트라고 하니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다른 악기를 한다고 하면 조금은 아는 것이 있다. 기타라고 하면 지미 핸드릭스라던가 연주에 대해 말을 꺼낼 수 있고, 드럼이라면 퀸의 로저 테일러가 있지 않은가. 보컬은 말할 것도 없고. 아니면 어떤 음악을 하는지 물어볼 수라도 있지만 문외한의 입장에서 베이스는 오래된 농담만 떠오를 뿐이었다.


‘밴드를 하면 기타는 자기가 보컬을 조종한다고 생각하고, 드럼은 자기가 진정한 밴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보컬은 자기 밴드라고 생각한다. 베이스는 보통 조용한데 이상한 놈들이다.’


이런 생각뿐이니 베이스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베이스 혼자서는 곡의 느낌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고, 음의 이동도 적으니 그냥 재미없다고만 느꼈다. 수많은 베이시스트에게 미안하지만,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의 아둔한 생각이 이런 걸 어쩌겠나 싶다.


A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직접 자신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베이스가 어떤 역할인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사실 라인을 깔아주는 역할이지. 베이스 없는 음악은 엉망이 되기 쉬워. 드럼 하고 기타, 보컬이 자기 잘난 맛으로 연주하려고 하면 그걸 제어해줄 수 있는 게 나뿐인 셈이야. 거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할까.”


농담에 나온 자의식 과잉은 기타나 보컬에만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놀리기는 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남들이 베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밴드에서 함께 하는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관객이나 다른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도 그는 즐기고 있었다. 


공연이 많지 않아도, 차고에서 연주를 하다 가끔 주점의 무대에 설지라도 그는 밴드 속에 함께 하는 삶이 그의 정체성이 되어 주었다.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종사하는 일에 불과했고, 베이시스트로의 직업이 그를 채운 셈이었다. 그러니 밴드에서 어떤 역할을 하던 그의 자신감은 확고했다. 공연을 하거나 연주를 할 때조차, 그는 베이스에만 집중하며 밴드의 음악을 들었다.


“내 시야에서 공연을 보면 나를 중심으로 반원 안에 관객부터 우리 밴드 애들까지 다 보이는걸. 굳이 사람들 보기에 주인공일 필요가 있을까? 내가 좋으면 되는 거지.”


사람들마다 각자 시야가 있었고, A는 자신의 시야에서 집중하고 있었다. 베이스 세상에 빠지며 자신의 삶을 자신이 가장 만족하는 세상으로 꾸미며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가 주인공이었고, 그가 만족하니 그걸로 끝이었다. 베이스를 잡은 덕분에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 공연의 숨은 모습도 볼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이렇게 듣고 나니 베이스를 잡는 그가 조금 달라 보이기는 했다. 있어 보인다고 할까.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 가득했던 그는 내 노트북을 잠시 빌리더니 그의 밴드가 공연하는 모습을 찾아 보여줬다. 그의 말 때문인지 공연하는 모습을 보는 내내 그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고, 다른 악기나 노래 보다 베이스에 집중했다. 나도 모르게 베이스의 시선에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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