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책을 사기 위해서는 동네에 있던 3층짜리 서점인 동원서적을 가는 방법뿐이었다. 인터넷 쇼핑도 없었고, 책 한 권을 사기 위해 서울까지 나갈 이유도 없었으니 동네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가까웠던 서점으로 자연스레 발길이 향했다.
서점은 도시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도로변에 서 있다. 주변에 있던 다양한 건물들이 사라지고 다시 세워지고, 주변 다른 가게들이 입점하고 폐점되어 온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도 아직 같은 자리에 있다. 구리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유년기 속에서 이 서점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장 교통량이 많은 거리에 있다 보니 누군가와의 약속 장소도 자연스럽게 이 서점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약속 시간보다 미리 온 사람들은 서점 안에서 책 구경을 하다 책 한 권 챙겨 나가기도 할 정도로 이 서점은 도시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서점은 나에게 책으로 만들어진 요새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구조가 조금 변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지하 1층이 어린이 서가였다. 할머니, 혹은 어머니와 함께 서점을 오면 꼭 지하 1층으로 향했다. 동화책부터 만화책까지 한 층을 통으로 사용한 이곳은 활자의 즐거움을 익혀 나가던 놀이터였다. 친구들끼리 오더라도 언제나 지하 1층으로 향했다. 한쪽 구석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쉽게 앉아서 놀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자리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서점에 머무를 수 있었다. 특히 이 공간에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던 만화책이나 동화책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보통 신간 만화나 잘 나가는 책은 얇은 비닐로 구매 전까지는 읽을 수 없게 포장해서 나오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비닐을 뜯어 두어 아이들이 쉽게 볼 수 있었다.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었다. 일종의 마을 놀이터 겸 도서관 겸 유치원 같은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서점에서 자라던 아이들에게 어느새 지하 1층을 벗어나야 할 때가 찾아왔다. 더이상 동화책을 읽기에는 시시하고 만화책을 읽기에는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머리가 커 가던 시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어느 정도 책을 읽을 줄 알게 되니 이제 장편 소설이나 인문 과학 도서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하를 벗어나 다른 층으로 향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딱 그 시기에 맞춰 지하 1층의 아이들을 위한 서가들이 사라졌다. 지난시기의 놀이터는 이제 1층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놀이터가 사라져 조금 아쉬운 면이 있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제 내가 갈 일 없는 곳이니 큰 미련이 남지 않았었다.
아무튼 머리가 조금 자란 이후에 참고서나 문제지를 살 때도 이 서점으로 향했다. 인터넷 서점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었지만 우리는 서점으로 갔다. 고등학생 때 즈음이 아마 초등학생 때 이후 가장 많이 서점을 갔던 시기가 아닐까 싶다. 수도 없이 문제지를 사야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서점은 친구들과 합법적 나들이 공간인 덕분이었다. 책이 있는 곳이라는 신뢰는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며 놀던 우리에게 마음의 짐을 덜어 주었고, 부모님들의 눈초리도 지워 주었다. 서점을 가득 메우던 수많은 책들은 우리의 방패인 셈이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는 합법적인 일탈 같은 행위도 필요가 없어졌고, 인터넷은 더욱 발달해 책을 인터넷에서 주로 구경하고 구매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동원서적은 굳건히 자리 잡고 같은 위치에 묵묵히 서 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면 언제나 조용하다. 자연이 주는 고요함과는 다른 기분이다. 자연의 고요함은 그 웅장함 속에 압도당해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나온다. 서점의 조용함은 서로 책에, 문장에 집중하려 한다는 배려에서 나오고 동시에 나 역시 그 안에 집중하며 마치 명상하는 듯한 차분함에서 나온다.
거대한 서점들이 날로 늘어나고 북적이지만 이렇게 고요함을 유지하는 서점은 적다. 바쁘게 돌아가는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이 안에서는 그 누구도 뛰지 않고 말소리도 죽여 오직 책 꽂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려온다. 고독과 고요는 한 끗 차이다. 서점에서 책으로 나고 자란 아이는 이 고요한 공간 속에서 성인이 되었다. 그래서 지친 일상을 살다가 조용한 고독의 공간을 찾고 싶을 때마다 이렇게 서점으로 돌아온다. 나는 아직도 서점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랬던 이 서점에 드디어 나의 이름이 박힌 책이 들어왔다. 심심하면 뒤져보며 새로운 책을 탐닉하던 서가에 들어온 내 책을 발견했을 때 기분은 뭔가 남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이 서점에서 책으로 위로를 받고 세상을 알아 온 덕분에 생겨난 복잡한 심경이었다. 서점 속 수 많은 작가의 문장들이 모여 나의 가치관을 잉태했다. 서점에 들어온 내 책을 보니 누군가에게 나의 문장도 그런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걱정이 생겼다. 나처럼 서점 안에서 자라는 누군가가 또다시 내 책을 발견하고 읽고 한 문장씩 가슴에 담지 않을까.
책이 처음 나오고 거대한 서점도 다녀오고, 인터넷 서점 속 내 책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 서점 안에 있는 내 책은 그런 뿌듯함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타지에서 살다가 성인이 된 아이가 나고 자란 도시로 귀향하는 마음이었다. 아직 고향에 남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 아버지에게 나의 발자취를 보여드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서점에서 자란 아이가 서점으로 돌아와 또다시 누군가의 생각 한 틈 사이에 자리 잡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