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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예찬

속초의 하늘과 바다와 산과 별은 영원하다

by 박희성

또다시 속초로 향했다. 속초가 좋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보러 갈 때 마다 와서 그런가 싶었지만 바다가 보고 싶으면 속초로 향하는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닌 걸 보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푸른 바다 덕분인가, 산수화 같은 설악산 덕분인가, 아니면 끝없는 백사장 덕분인지 모르지만 속초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다. 정확히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기분이다. 속초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동해 바다인 덕분도 있을 것이다.


속초는 발음 하기도 좋다. 속 하면서 들어온 공기가 슴슴하게 나가지 않고 초! 하면서 빵 터진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후회와 회한이 모인 마음 속 공기가 한 번에 시원하게 나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한 번 발음해 보시라. 속, 하고 쉬었다가 초. 이름 덕분인지 무언가 속초에서는 불안했던 내가 터지면서 잠잠해지는 그런 동네로 느껴진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나타나는 속초 해수욕장의 푸른 바다도 좋고, 속초의 기둥인 설악산의 멋진 풍경도 좋다. 혹은 청초호의 야경도 볼만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아무래도 속초항이다. 연금정부터 이어져 속초항을 두르고 있는 방파제. 아침 해가 떠오를 때부터 찬란한 이곳이야 말로 바로 속초에 온 이유가 되며 동시에 속초의 모든 것은 담아둔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속초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방파제 바깥 부분의 외항에는 거친 동해 바다가 철썩인다. 짠 바다 냄새가 파도에 실려 한 번씩 코를 찌른다. 수산 시장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와는 다른 시원한 냄새다. 특히, 일출을 바라보는 아침에 풍기는 차갑고 찌릿한 바다 짠내는 하루를 시작하는 커피처럼 정신을 맑게 해준다. 해가 중천으로 이동하면 이곳에서 바라본 속초는 화사하다. 특히 햇빛이 쨍쨍한 날에는 화사하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하다. 하늘만큼 맑은 바다는 파란 물감을 엎질러 놓은 듯 깊고 푸르다. 내항을 바라봐도 여전히 맑다. 깊은 외항과는 다르게 맑은 물 속으로 초록빛의 수초들이 어지럽게 흐드러져 마치 숲이 바다로 옮겨온 듯 하다. 그리고 숲 속에는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듯 이 내항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수초 사이를 날아다닌다.


그런 와중에 내항 뒤로 보이는 고고한 설악산은 고목처럼 이 풍경 속에서 묵묵히 서 있다. 봄이면 아직 녹지 않은 눈을 차분히 보관한 채로, 여름이면 우리가 아는 푸른 산의 모습으로, 가을이면 서서히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며, 겨울이면 다시 새롭게 태어난 흰 모습으로. 설악산의 매력은 아름다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산은 미세먼지도 걸러주는 것 같다. 덕분에 하늘 안에 서 있는 산은 선명하게 푸르다.


다양한 매력이 있지만 속초항 방파제의 하이라이트는 일몰이다. 붐비던 사람들이 어느 새 저녁을 먹으러 떠난 이후 적막한 풍경의 시간이 찾아오면 푸르던 바다와 하늘에 약간의 노란색이 더해진다. 그러면서 산맥 등 뒤로 서서히 사라지는 해를 따라 하늘을 주황빛으로 변해가고 바다 역시 닮아간다. 그리고 석양을 천천히 음미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아침에 해가 뜨던 외항의 바다부터 까만 어둠이 찾아온다. 산이 서쪽에 자리잡고 바다가 동쪽에 자리잡은 덕분에 이곳에서는 일출이나 일몰을 원하는 시간에 맞춰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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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에 걸쳐 이곳을 찾아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같은 바다 위에서 같은 해가 뜨고 같은 산 뒤로 넘어가며 같은 어둠이 찾아온다. 인간이 만든 다양한 건물들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가만히 서 있는 산맥과 하늘처럼 투명해 보이는 내항, 그리고 강하게 파도를 치며 살아있는 듯한 외항의 모습은 그대로다. 그래서 이곳이 좋다. 아름답고 찬란하지만, 변하지 않으니.


유한한 인간은 언제나 변하지만 무한한 자연은 오히려 바뀌지 않고 그대로이니 아이러니 하다. 처음 속초를 찾았을 때와 지금의 속초는 너무도 많이 바뀌었지만, 바다와 산은 그대로다. 아빠 손을 잡고 왔던 어린 꼬마였던 나 역시 자라고 많이 바뀌었지만, 자연은 그대로다. 하나의 연속성을 가진 인간이라 생각해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 했지만, 자연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같은 인간이 아니다.


뻥 뚫린 기분. 시원하다. 머리는 복잡해도 몸은 시원하다. 깊은 바다 향 가득한 숨을 들이마시고 속, 그리고 가슴 가득한 걱정을 내뱉으면서 초. 거대한 자연 속에 하찮도록 작은 내가 숨을 쉬다가 가고, 다른 사람들이 왔다가 또 위로 받고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왔다 간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바다는 푸를 것이고, 산은 높을 것이다. 바뀌지 않는 건 속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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