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동네에 서 있지만 달라지는 풍경들
지지부진했던 협상이 15년 만에 끝나고, 드디어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재개발 결정이 난 구역 근처에는 천으로 만든 장벽이 세워졌다. 그 넓은 동네를 모두 감싼 주황빛 장벽은 옛날 수영장 탈의실 천 쪼가리 마냥 바람에 나풀거렸다.
정말 길고 긴 협상 기간이었다. 재개발 협상이 시작된 이후 동네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하게 갈렸다. 재개발을 기다리며 결정이 되자마자 보상비를 받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받아도 갈 곳 없는 사람들이나 굳이 떠나기 싫은 사람들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기에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혹은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끝났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제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만큼 이해관계 또한 복잡해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 골목과 골목 사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살던 공간이었지만 어느새 그 누구도 살지 않는 버려진 동네가 되었다.
길고 지루했던 협상이 끝나자마자 꽁꽁 싸매고 새로 태어날 준비를 마쳤다. 이미 먼저 재개발을 끝마치고 웅장한 아파트로 거듭났던 우리 아파트에선 새로 재개발이 시작된 이 지역이 인큐베이터 안 신생아처럼 적나라하게 보였다. 폭설이 끝나고 봄기운이 돌던 어느 날, 천으로 둘러 쌓인 그 넓은 지역의 빌라와 단독주택들의 철거가 시작되었다. 지어지기까지 수년이 걸리고, 그 안의 추억들이 수십 년에 걸쳐 쌓인 것에 반해 철거는 순식간이었다. 아직 응달에 남은 지저분한 눈들은 마치 치워지지 않은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철거반들은 속도를 냈다.
철거당하고 있는 건물들은 조용히 바라봤다. 이미 무너지고 포클레인이 서 있는 빌라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태권도장에서 만난 친구네 집이었다. 먼지가 나지 않게 물을 뿌리며 조심히 무너뜨리는 건물은 파란 간판의 구멍가게였다. 불량식품을 사러 갔던 꼬마가 커서 담배를 사러 들어간 구멍가게였지만,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부의 모습은 하나도 변치 않았던 곳이었다. 혼자만의 추억이 있는 구멍가게 위에, 아직 철거되지 않은 아슬아슬한 집은 재개발 협상 기간 동안 현수막이 붙어 있던 목욕탕, 그리고 그 뒤의 작은 언덕에는 항상 나보다 나이 많은 무서운 형 누나들이 모여 있어 할아버지나 할머니 손을 잡고서만 갈 수 있던 골목이었다. 추억이 쌓인 속도에 비해 무너지는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포클레인의 빠른 손놀림처럼 내 머릿속에서 이 동네의 추억들도 빠르게 사라져 갔다.
재개발은 필요했다. 우리 동네는 서울 바로 옆 동네에 지어진 베드타운이었다. 서울로 향하던 사람들에게는 집이 필요했으나 서울의 높은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이 동네로 향했다. 이미 지어져 있던 빌라들은 그 수요를 충족하지 못했다. 붉은 벽돌이 유행하던 시절 지어진 빌라나 연립 주택들은 이미 긴 세월의 흔적이 두 눈으로 보일 정도로 낡았고,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을 감당하기에는 용적률이 부족했다. 높은 아파트가 필요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해야 했고, 낮은 건물보다는 높은 아파트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했다.
그래도 잊히게 될 수밖에 없는 추억들은 아쉽다. 아직은 기억 속에 선명한 골목이지만 몇 달만 지나면 옅어질 테니. 그리고 또다시 몇 년이 지나고 거대한 아파트가 웅장하게 자리 잡으면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 테니. 고향이라 부르던 작은 동네에 자본이 들어오면서 동시에 흩어지는 추억이 아쉬웠다. 태어나고 지금까지 떠나지 않은 도시이기에 어린 시절의 나나 지금의 나나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바라보는 시선과 같이 놀던 사람들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 오랜 시간 함께해온 동네이고 친구이지만 눈앞에서 사라지니 순식간에 잊혀 버린 기분이다. 추억이 쌓이는 속도는 너무도 무디지만 사라지는 속도는 순식간이다.
철거가 시작되기 며칠 전, 아직 골목길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동안 그 거리를 배회했다. 국수 가닥처럼 늘어진 전선과 깨진 유리창 사이로 보이는 집은 이미 쓰레기와 먼지만 가득했다. 버려진 차 위로는 부서진 갈색 가구가 처참히 던져져 있었다. 불과 몇 년 전, 아니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살던 곳이지만 이젠 길 잃은 가로등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함께 빛나던 가로등들은 이미 눈을 감았고, 홀로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는 가로등은 안쓰러워 보였다.
그리고 이 가로등 뒤에는 친구가 살았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친구의 얼굴은 빛바랜 잉크처럼 희미하게 형상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도복을 입고 품띠를 매고 뛰어다니던 친구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친구는 과연 실존한 추억이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다. 기억 속 희미해진 친구의 얼굴처럼 이 동네도 이제 내 기억 너머로 희미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