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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잃은 화, 악랄하고 잔인한 감정

이반 4세와 영화 <훈계>

by 박희성

지금의 러시아를 완성했다고 볼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이반 4세는 그 업적보다는 홧김에 아들을 때려죽인 뇌제, 잔혹한 왕으로 유명하다.


러시아라는 나라가 작은 도시국가 연합체에서 벗어나 나라로써 기틀을 잡은 것이 이반 3세였다면, 이반 4세는 조부인 이반 3세 때 아직 몰아내지 못했던 몽골 잔당들을 모두 영토 외로 몰아내고 몽골 타타르 멍에를 종식했다. 모스크바와 그 일대에 그치던 영토를 볼가강과 카스피해 일대까지 넓혔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테트리스로 유명한 성 바실리 사원까지 지었다. 영토 확장과 더불어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쥔 이반 4세부터는 공식적인 호칭으로 차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위대한 왕으로 군림한 이반 4세였지만, 지금 우리에겐 폭군, 뇌제로 불리고 있다. 이반 4세에게 가득 차 있던 그의 분노는 그를 강한 왕권보다 폭력의 왕으로 기억하게 한다. 특히, 아들을 지팡이로 때려죽인 극악무도한 왕으로 말이다.


이반 4세는 당시 임신한 며느리인 황태자비의 복장 불량을 지적했다. 차르인 자신의 명령에도 개선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반 4세는 자신의 며느리이자 황태자비를 폭행해 유산시키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이자 황태자가 대들며 항의하자 이반 4세는 이성을 잃고 자기 아들에게도 지팡이를 휘두르며 끝없는 폭행을 자행한다. 결국 아들은 맞다 쓰러졌고, 얼마 되지 않아 곧 사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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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라는 그림은 이반 4세가 아들을 죽을 때까지 두드려 패고 난 이후 제정신으로 돌아와 아들을 끌어안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넋 나간 얼굴로 아들을 감싸고 있지만 이미 싸늘해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림 속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이런 광기 서린 분노에서 빠져나온 후 허망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차갑게 식은 아들의 눈과 옆에서 후회하며 울음이 곧 터질듯한 이반 4세의 얼굴의 대비는 분노를 참지 못한 순간의 감정이 폭발한 비극의 주인공이 맞이하는 안타까운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물론 이반 4세가 벌인 비극 같은 폭력에는 어린 시절의 불행한 개인사로 인한 정서 불안과 매독으로 인한 정신병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내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발산한 비참한 분노로 인한 피폐해진 파멸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에 맞아 죽었고, 며느리는 유산했으며 아버지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경험했다.



한 때는 마음속에 화가 많았다. 솔직히 지금이라고 해서 없지는 않다. 가끔가다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날 때가 있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답답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세상 모든 것에 짜증이 나고 어느 순간부터 부글거리는 감정이 치솟는다. 미간에는 주름이 잡히고 답답한 가슴에서 바람이 빠져나오듯 한숨만 내쉰다. 그래서 때로는 방향성 없는 폭발로 이 화를 표현하고 싶다.


화를 내는 감정이 가장 들끓을 때는 화내기 직전이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앓는 듯이 부글거리고, 숨이 막혀 답답한 단계를 거치고 나면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지고 만다.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무언가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화를 내뿜고 나면 어느 순간 차디찬 칼바람이 가슴을 스쳐 지나간다. 감정이 격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엇을 위해 화를 냈는지 불분명해지고, 단순히 감정 배설에 지나치지 않게 된다. 그것도 타인을 향한 배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도 최소한의 이성의 끈이 남아 있는 한 이유 없는 화는 억눌러야 한다. 화가 불러올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타인과 나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는 너무 아프다. 게다가 화를 감당하는 사람의 불쾌함은 물론이고 이후의 뒷감당은 다시 차가워진 내가 해야 한다. 화를 내는 그 순간 동안에는 무언가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런 이유로 화를 내고 어색한 상황이 다가오면 더욱더 춥고 외롭다.


크리스토퍼 사베르의 단편 영화인 <훈계>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갈등을 빚으며 서로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마트에서 잘못을 저지른 딸을 때리며 훈계하는 아버지에게서 시작한다. 아버지는 딸을 훈계한다고 생각하지만, 옆에 있던 한 변호사의 눈에는 단지 아동 학대일 뿐이다. 하필 오늘 기분이 나빠 술을 마신 변호사는 “이럴 바에 사우디를 가시지 그래요.”라며 아이의 아버지를 모욕한다. 인종, 종교 차별적인 언행을 하는 변호사의 말을 들은 한 알제리 출신의 남자는 이에 화를 내려던 찰나, 이번에는 계산이 밀려 화가 난 프랑스인이 빨리 계산을 하라며 이집트 이민자 출신 마트 주인에게 화를 내고, 이집트 출신의 마트 주인은 알제리인의 말투에 신경질을 내며 말다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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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에도 복잡한 갈등 양상은 이내 수습되는 듯하지만 마트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폭발한다. 마트 안에서 쌓아 놓은 갈등은 폭발하지 않았고, 마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시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알제리계 남자는 눈앞의 자동차 백미러를 발로 차 부러뜨리며 프랑스인에게 화를 내고, 이번에는 자동차의 주인이었던 변호사의 남편이 화를 낸다. 반대쪽에서는 아이의 부모와 변호사가 서로 싸운다. 이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건물 위 발코니의 한 남자는 밑을 바라보며 시끄럽다고 소리를 치고, 밖에서 이 싸움을 구경하며 담배를 피우던 한 무리는 소리치는 남자에게 시비를 건다. 그리고 이 작은 마트 앞 골목은 아사리판, 아수라장이 되고 모두가 서로 뒤엉키며 거대한 싸움으로 번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짧은 시간 동안 폭발하는 감정 배설의 흐름과 결과를 몸소 보여준다. 무작위한 타인들에게 향하는 화라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폭발하며 점차 커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분노가 발산되어 간다. 이런 감정을 억누르고 참아내는 것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영화 속 인물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표출한다. 모든 화의 시작은 조그마한 감정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말을 듣지 않는 딸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고, 변호사는 오기 전에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며 술 한잔을 이미 한 상태였고, 프랑스인은 계산대에서 오래 기다렸고, 알제리인과 이집트계 사람들끼리는 각자의 본국과 관련된 갈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화는 상대의 잘못으로 인해 나는 화라기보다 광기에 가깝다. 자기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밖으로 잘못 표출된 탓이다. 화가 광기로 발산되니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까지도 슬픈 비극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반 4세의 슬픈 눈이 주는 교훈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방향 잃은 화는 언제나 비극을 불러온다. 굳이 날카롭게 상대를 대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분노의 방향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 지 한 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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