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타이밍, 어쩌면 착각

<어바웃 타임> -2, 사실 타이밍이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면?

by 박희성

대학교 신입생 시절 동기들을 따라 미팅을 몇 번 나갔다. 미팅은 참 알 수 없는 만남이다.


한 술집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6명은 술이 들어가기 전까지 어색한 웃음만 가득하다. 각자 자기소개를 끝내고 나면 주문한 술과 안주가 오기 전까지 초조한 침묵이 두 남녀 그룹 사이에 먹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나마 말을 좀 재밌게 하는 친구가 있다면 다행이다. 그 친구가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꺼내며 침묵에 금을 가게 만드는 덕분이다.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오고, 술이 한 두 병 씩 쌓여가면 금세 까르르거리며 언제 어색했냐는 듯이 시끄럽게 놀게 된다. 완전히 알지도 못하는 이성들과 모여 술을 마시고, 알딸딸한 기운에 조금 친해지며 서투른 농담을 주고받다가 막차가 끊기기 전에 나와 인사하고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영영 헤어진다.


나에게는 그런 것이 미팅이었다. 워낙 숙맥인지라 큰 인상을 남기지도 못했고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탓에 금방 취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팅에서 만나 사귀게 된 동기들도 있긴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대학교에 입학했고, 20대의 풋풋하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인지 새로운 미팅 자리가 성사되면 가슴이 또다시 두근거렸다. 이런 꾸준한 노력 덕분인지 한 여학생과 따로 에프터를 신청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다른 이성과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자리, 소개팅처럼 완전히 처음 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알고 지낸 친구 같은 사이도 아닌 어색한 두 남녀의 만남은 이성과의 만남에 서툰 20대 청춘에게는 설레면서도 떨리는 그런 자리였다. 만나기 한 시간 전까지 머릿속에는 설레발이 가득했다. 만약 서로 마음에 들면 언제 고백을 해야 하지, 다음에는 어디를 가지, 함께 벚꽃은 보러 갈 수 있겠지 같은 망상으로 마음은 들떴다.


만남은 편안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상대가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맞춰준 덕분에 편한 분위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즐거운 저녁을 보내고 난 이후 그녀는 새벽에 내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 주었다. 학교 생활과 인턴 활동이 너무 바빠서 미안하지만 만날 수 없겠다고. 정말 좋은 사람이니 꼭 다른 좋은 인연이 있으면 좋겠다는 식의 문자였다. 이른 아침 설레며 잘 잤냐는 문자를 보내려던 내게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배려가 가득한 문자로 완곡하게 거절한 셈이었지만 나에게는 큰 실망으로 다가왔다. 설레발은 필패라고 했던가. 부푼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자 너무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시간을 돌려 조금만 일찍 만날 수 있었더라면, 아니면 시간을 앞당겨 그녀가 조금 여유로워진 이후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필 이런 타이밍에 만나게 되어 인연을 놓쳐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2.JPG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인 팀의 첫사랑은 마고 로비가 연기한 샬럿이다. 긴 여름 방학을 맞아 팀의 집으로 놀러 온 샬럿은 상당한 미모를 보여준다. 마고 로비의 아름다움이 극한으로 끌어올려진 듯한 모습에 숨이 막힌다. 그 모습을 실제로 바라보고 있는 팀 역시 그랬다. 팀은 샬럿과 시간을 보내며 점차 스며들었다. 결국 여름 방학이 다 끝나버린 이후 고백을 하지만 나처럼 차이고 만다. 샬럿은 “마지막 밤까지 기다렸다는 게 아쉽네. 시간이 있었을 때 왔어야지…”라고 말하니 팀은 능력을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 다시 고백한다. 충분히 친해진 이후이지만 아직 시간이 있던 시간대로 간 팀은 샬럿에게 고백하지만, 이번에 샬럿은 마지막 날에 고백하면 어떠냐고 말을 한다.


거절의 방법이 두 번 나왔을 뿐 샬럿은 팀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년 후 런던에서 우연히 만난 샬럿은 팀에게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간다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탓일까. 시간을 돌리고도 실패한 고백이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받아준다는 샬럿의 말에 팀은 홀린 듯이 메리에게 돌아간다.


마고롭.JPG


첫사랑의 달콤한 향기에 잠깐 유혹된 탓에 잠시 능력을 쓰지도 않고 과거로 돌아갔다 온 듯한 느낌을 받은 팀이다. 어찌 보면 바람을 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밀란 쿤데라의 명언인 '소설은 도덕적인 판단이 중지된 땅이다.'을 생각하자. 지금은 팀의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니까 그런 이야기는 쉿.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순간이라 생각했지만, 인연이 아닌 셈이다. 상대의 눈에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일 수도 있고, 거꾸로 용기 내지 못한 이유 역시 내 마음속에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만난 샬럿이 그때 만약 네가 고백했다면 받아줄 텐데 라는 말은 타이밍의 여지를 남기지만, 이미 한 번 시간을 돌려 고백을 했던 팀의 입장에서는 다시 만난 샬럿의 고백은 무의미했다.


언제나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했지만, 수많은 타이밍 맞지 않은 인연들은 그냥 인연이 아닐 뿐 다른 의미는 없다. 내가 덜 좋아했거나, 혹은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놓치는 경험은 잔인하다. 그리고 놓치고 난 이후 뒤돌아 후회하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한탄하지만, 사실 둘 중 한 명의 마음이 확실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더욱 맞는 표현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그 시절 타이밍이 맞았다면 이라는 상상을 가끔 해본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상상은 내 입장에서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된 사랑이다. 현실을 생각하고 만약 그때 그 거절이 타이밍이 아니라 네가 의도한 것이라면… 잔인한 상상이라 포기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방향 잃은 화, 악랄하고 잔인한 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