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수학여행의 메카였다. 서울과 경기를 비롯해 경남 지역을 제외한 많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한 번 씩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 부모님도 경주를 다녀오셨고, 우리 세대 역시 줄곧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니곤 했다. 그 덕분에 석굴암이라든지, 불국사라든지, 아니면 천마총을 비롯한 다양한 릉이라던지 하는 수많은 유적지들을 이미 알고 있었고, 다녀오기도 했다.
대중음악박물관은 그런 유적지와는 색다른 박물관이었다. 개인 소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박물관 안에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가 총망라되어 있다. 보문 관광단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박물관에는 주중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휑한 박물관으로 혼자 들어가 표를 끊고 바로 2층으로 향했다. 곧이어 한 노부부가 뒤따라 들어왔다. 구한말부터 시작되는 대중음악의 계보를 따라 이어진 전시는 한민족 최초의 실린더 음반, 축음기, 독립선언서 유성기 음반 등 꽤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1920년대의 전시에 들어서자 서서히 당시 사람들이 직접 듣고 즐기던 대중음악이 나왔다. 김영춘, 박향림, 채규엽 등 이름도 들어보지 않은 과거의 가수들과 그들의 노래였다.
너무 먼 과거라 와닿지도 않았다. 192~30년대라니. 엄마, 아빠는 커녕 할머니도 태어나시기 전이고, 할아버지도 겨우 태어날까 말까 하는 세대다. 그래도 박물관에 왔으니 바로 지나치기엔 죄책감이 생겨 가만히 서서 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노부부가 다가왔다. 내가 보고 있던 전시로 다가온 할아버지는 채규엽, 김영춘 등 당연히 알고 있는 가수인 듯 말을 꺼냈다. 어떤 가수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사람과 스캔들이 났는지 알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아이돌 A의 신곡이 어떻고 가수 B의 시시콜콜한 연애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 있는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옆에서 빤히 쳐다보며 신기해하는 나를 본 할머니는 웃으며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귀에서 귀로 전해 들어온 이야기라며 놀랄 것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1960년대 전시에 다다를 때까지 개인 오디오 가이드처럼 가수 한 명 한 명, 노래 하나하나 설명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어느새 두 노부부는 앞서 나갔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아는 노래들이 하나둘씩 흘러나왔다. 그들 역시 내 앞에서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서로 다른 지류에서 흘러 들어온 냇물이 강에서 만나 하나의 물결이 되어 바다로 향하듯이 1920년부터 이어지는 그들의 기억과 1970년부터 시작되는 나의 기억이 하나로 합쳐졌다. 완전히 다른 세대라 생각했지만 사실 하나의 시간 선 상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노래들은 부모님의 세대였다. 부모님이 어린 시절 듣던 노래가 그들의 삶을 관통하며 꾸준히 흘러나왔고,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살던 나 역시 익숙하게 젖어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시간이라는 존재가 유연하게 연결된 채로 흐른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미 나를 낳은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들 역시 나와 같은 20대의 시절이 있었고, 앞서 만난 노부부 역시 우리 부모 세대를 낳기 전에는 같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빠르게 바뀌었다. LP가 카세트테이프가 되고, 카세트테이프가 CD가 되고, CD가 디지털 음원이 되었던 시간 동안 우리 모두의 시대는 빠르게 바뀌어 갔다. 그래서 지금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마치 다른 시대를 사는 듯 잊어버릴 때가 많다. 기술은 발전하며 점점 더 편하고 빠른 세상으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들어있는 콘텐츠와 추억은 여전히 존재하고 꾸준히 이어지며 같은 세월 속에서 살아간다.
경주에 왔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 역시 이런 현재와 과거의 공존이었다. 대릉원 같이 입장료를 내고 가야 하는 그런 유적지 말고, 금령총이나 식리총 같은 대릉원 일원을 걷다 보면 언제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년 전 누군가의 무덤이었던 이 장소에서 사람들은 강아지와 산책하고, 전화를 하며 천천히 걷고, 주변에 앉아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거에 얽매여 있는 유적지라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공원의 모습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경주 읍성 주변에 지나가는 자동차는 조선시대의 향일문 아래로 지나가며 일상 속에 녹아진 과거의 흔적처럼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같은 시간대에 있는 과거와 현재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흘러가는 세월 속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주하면 대중음악 박물관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유적지와 그 주변의 박물관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과거부터 흘러온 시간의 연속을 두 눈과 두 귀로 똑똑히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박물관과, 과거와 현재가 만나 지금을 살고 있는 수많은 유적지가 몸소 보여준다. 둘 중 하나가 더 돋보이거나 더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보았다.
같은 시간대 속에 사는 우리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같은 공간 같은 세월을 나눈다. 결코 타인이 아니다. 언제부터 이런 세대 간의 차이를 서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2030이니 4050이니 하며 세대를 나눠버린 단어 때문이다. 단어가 만들어낸 허상의 벽을 너무 쉽게 믿고 있었다. 특히, 선거를 바탕으로 세워진 다양한 벽은 우리를 계속해서 갈라놓으며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물론 정치에서 세대를 구분해서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서로 표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런 세대의 벽은 더욱 견고해지고 서로를 타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하는 자세는 경주 그 자체였다. 젊은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 먼저 서 있던 사람들을 존중하고, 먼저 세월을 겪은 사람들은 새롭게 시간 축 위로 올라온 사람들을 배려하며 서로 같은 시간 상에 존재하고 있는 타인이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긴 시간 속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다시 믿고 하나가 되어야 지금처럼 울분만 가득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