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전쟁과 야욕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국적에 상관없이, 수천이라는 숫자의 인간들이 피 흘리고, 고통받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많은 피가 터져 나왔음에도, 개인에 불과하던 많은 사람이 자신과 가족, 그리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 100년의 세월 동안 독립운동, 한국전쟁, 민주항쟁을 겪은 우리가 반복한 비극이 저 멀리 우크라이나에서도 일어났다. 그렇기에 더욱 가슴 아파하며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 있다.
숭고한 희생을 겸허히 받들며 전쟁에 참여한 이들과 다르게,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침공해 들어온 군인 중에는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지도 모르는 어린 군인도 허다했다. 어떤 일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그들은 포로로 잡혀 엄마에게 전화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차라리 전화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침략군이라는 낙인이 찍힌 이들 중에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죽고 난 이후 받는 것이라곤 가족에게 쥐여 주는 돈 몇 푼. 그것도 폭락해버린 화폐로 찍어낸 피 묻은 돈이다. 어떤 명예도 어떤 사명감도 없이 사라진 젊음은 말이 없다. 늙은 정치인의 명령 하나로 서로의 불신과 혐오를 억지로 생산하며 시작된 차가운 전쟁은 이렇게 외롭다.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한 사람의 마음에 꿈틀대던 작은 촛불도, 꿈을 향해 일렁이던 눈 속의 작은 불꽃도, 누군가를 사랑하던 두근거리는 심장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미 죽어버린 그들이 꿈꾸던 미래는 이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이 전쟁터에서 먼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겐 숫자와 도표로 나타날 뿐이다. 지도 위에 찍어낸 작은 숫자와 상관없는 개인들은 이미 사라진 병력일 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숫자다. 늙은 정치인 뒤에는 아직 수만의 숫자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
에리히 레마크르의 소설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1차대전에 참전한 한 병사의 시선으로 전장을 바라보며 진행된다. 어른들은 참전해야 용감한 사람이라 북돋고, 아이들은 죽음에 익숙해지며 몇 년 만에 노인으로 변해 버린다. 명분도 없고 지켜야 하는 이유도 없는 전쟁이다. 사실 이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 전쟁이 의미 없고 명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의 중반이 되어서 주인공을 포함한 병사들은 이 전쟁의 명분을 찾는다. 나가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고 절반이 죽고 난 이후에 드디어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전쟁이란 게 있는 거지?>
<전쟁으로 분명 득을 보는 사람이 있는 거지.>
<뭐, 나는 그렇지 않은데,>
<물론 너는 아니지. 여기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지.>
<그럼 대체 누가 득을 본다는 거야?>
그 누구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이다. 100년 전 1차 대전 전선에서 싸우던 이 젊음이나,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 어느 전선의 젊음이나 같은 전쟁을 반복하고 있다. 영문도 모르고 침략의 주체가 된 러시아 병사도,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가족과 나라를 위해 싸운 우크라이나의 병사도 어떤 이유로 이 전쟁이 이어져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길고 지루한 전쟁이 이어지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함께 전쟁을 겪던 주인공이 전사하자마자 순식간에 끝을 맺는다. 전사를 한 이후 그날 사령부에 보고된 보고서에는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짧은 글로 사라진 주인공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 누군가의 보고서에 올라갈 사라진 청춘 역시 짧은 몇 마디로 축약된 채 적혀질지 모른다.
하지만, 전선에 이상이 없다고 보고되었을지언정, 그곳에는 사람이 있다. 전쟁을 시작한 개인의 욕심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사랑하고, 기도하고,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의미 없는 전쟁보다 훨씬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