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의 떡볶이를 먹고 싶다
동생이 떡볶이를 시켰다. 나는 솔직히 동생이 시키는 떡볶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먹기 위해서 주문한 것도 아니고, 동생이 먹고 싶어서 주문한 것이니 아무 말하지 않는다. 동생이 주문한 떡볶이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겨 온다. 떡볶이가 만원을 넘는 시대이다 보니 가격만큼 양도 많다. 떡과 어묵보다는 햄, 당면, 분모자 같은 다양한 것들이 들어간다. 한동안은 엄청 매운 떡볶이였다. 이렇게 매운 걸 먹고 위가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때문인지 시뻘건 떡볶이 위에는 매운맛을 중화하기 위한 치즈가 듬뿍 올라가 있다. 요즘은 그런 떡볶이보다는 크림이 들어간 로제 떡볶이다. 맵지 않고 치즈향이 묻어난다. 로제 파스타에서 나온 덕분인지 그렇게 거부감이 있지는 않다.
언제나 양이 많아 동생이 다 먹지 못하고 남겨두면 이제 집에 돌아와 배고파 이리저리 하이에나처럼 남은 음식을 탐하는 내가 처리한다. 그래서 별소리 없이 먹긴 하지만 나에게 떡볶이는 이런 떡볶이가 아니다.
떡볶이 앞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되어버린다. 자고로 떡볶이란 옅은 붉은색에서 주황색 빛이 돌고 작은 가래떡을 써야 한다. 거기에 국물이 충분하고 안에는 떡과 어묵, 파 만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오랑캐의 식습관이 곁들여진 떡볶이를 떡볶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남은 떡볶이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면서도 이런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역시 음식에 빠질 수 없는 향신료 중 하나는 추억이다. 추억이 깃든 맛은 다르다는 사실은 이제는 너무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추억의 음식은 하나 씩 있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추억이 들어간 음식은 먹을 때마다 떠오르며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향신료를 섞는 기분이다.
내가 먹었던 떡볶이의 기원은 학교 앞 문구점이었다. 맵기보다는 애들 입맛에 맞춘 달달한 떡볶이였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는 색을 입히기 위한 수준으로 옅은 매운맛을 품을 뿐이었다. 어묵과 떡의 달달하지만 살짝 매콤한 그 맛을 종이컵 가득 채워 가는 그날은 기분이 좋았다. 돈이 없으니 매일 먹지는 못한 덕분에 한 번의 기회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가끔 운이 없는 날에는 파가 떡인 척 숨어 있기도 했다. 못 먹을 음식을 먹은 듯 파를 뱉어 냈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파이지만. 파가 얼마나 맛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위생 관념 따위는 없었던 것 같다. 더럽다면 더러운 찌든 때 가득했던 곳이었지만 먹는 우리도, 만드는 아줌마도, 심지어 지켜보는 학부모도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러워도 더럽다는 생각을 할 수 조차 없는 위생 개념의 무지는 파리만 안 들어가면 되지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만약 지금 그런 식으로 운영한다면 위생 경고부터 잡다한 벌금을 모조리 받고 폐업 처분당하지 않을까.
아무튼 그렇게 무관심한 위생만큼이나 건물 외벽 역시 무관심의 소치였다. 나이트 홍보 문구나 잡다한 광고 문구가 적힌 낡은 포스터가 떨어지자마자 새롭게 포스터가 붙여졌다. 덕분에 포스트 모더니즘 예술작품 같은 기괴한 광고 더미의 흔적이 벽에는 가득했다. 아직도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서 떡볶이를 먹는 날은 거의 없고 대개 밖에 서서 컵에 담아 먹는 덕분에 아직 기억하고 있다. 컵에 담긴 떡볶이는 300원 상당이었다. 한 손에는 신발주머니를, 다른 한 손에는 이 컵 떡볶이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작은 종이컵에 담아주는 이 떡볶이는 유년 시절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립지만 이제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맛. 아쉽다. 비슷한 떡볶이 집, 흔히 말하는 시장 떡볶이가 있긴 하지만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완전히 따라 하는 맛을 찾기는 어렵다. 그때 그 기억 속 분식집과 함께 하던 유년 시절의 유일하던 간식 말고 너무나 많은 먹을거리가 넘쳐난 탓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