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움이 세상을 구하길
동그란 눈에 뾰족한 귀, 앙증맞은 코와 옆으로 누운 3 같이 생긴 귀여운 입까지. 고양이는 언제나 옳고 언제나 귀엽다. 하지만 고양이 낸시는 그것보다 더욱 귀엽다. 리본을 달고 있는 새하얀 낸시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풀린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꼬리를 가지고 있고, 매일 다른 리본을 다는 패션 센스를 가지고 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 불러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엽다.
반대로 쥐의 입장에서는 고양이는 천적이자 두려운 존재다. 만화 안의 세계관에 있는 백과사전에서도 고양이의 주식이 쥐로 적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천적 관계인 생쥐 더거와 더거의 아들 지미는 아기 고양이 낸시를 처음 본 순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위험 보다는 버려진 아이의 안타까움이 우선이었다.
아무리 집에 숨겨서 키운다고 해도 자기 몸보다 거대한 고양이를 들키는 건 시간 문제다. 처음에는 고양이를 두려워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숨기려고 했지만, 이내 발각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고양이들은 언제나 위험한 존재이니 어서 더 커지기 전에 쫓아내라고 더거를 압박한다. 하지만, 이내 낸시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나니 모든 마을 쥐들은 낸시를 더거의 딸이자 지미의 동생으로 인정했다. 귀여움 뒤에 숨어버린 무서움이다. 고양이를 도망가고 피하는 것이 쥐의 본능이지만, 그런 본능을 뛰어 넘는 낸시의 귀여움 덕분이다.
이후로는 모두가 고양이인 낸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고양이 낸시, 생쥐 낸시가 아닌 그냥 그 자체의 낸시로 인정한다. 귀여운 고양이와 지켜주려는 친구들, 어른들이 가득한 유토피아 같은 마을이다. 힘들지 않은 이야기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쉽게 볼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생명에 대해 어떤 차별도 없이 함께한다. 차별이 아닌 차이가 무엇인지 그 어떤 이야기보다 아름답고 귀엽게 알려주는 만화다.
낸시가 마을 식구가 된 이후 다른 마을에서 돌아온 헥터만이 오직 고양이가 위험하다고 마을 주민들을 설득한다. 책으로만 배운 지식으로 낸시는 위험한 생물이라고 생각하는 헥터는 고양이가 위험한 생물이니 낸시 역시 위험하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결국 고양이가 아닌 낸시 그 자체로 낸시를 바라보게 된 이후 자신의 차별적인 생각을 철회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지 않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머리 속에서 이 사람의 성별, 인종, 나이, 재산, 사회 심지어는 관상 등을 먼저 보게 된다. 그리고는 그 배경 안에 있는 그 사람을 보고 일반화를 하게 된다.
낸시를 만난 마을 사람들처럼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타인에 대해 경계를 가지고 천천히 접근하는 것이 인류가 지금까지 번성할 수 있게 된 DNA니 말이다. 하지만 차별과 혐오 역시 이런 선입견에서 나온다. 쥐 마을 사람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낸시를 보고 쉽게 그 벽을 허물었다.
어떤 사람이 위험한 행동을 했다면 그 사람 자체의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인종, 민족 등을 그 한 사람으로 매도하며 차별을 일상화한다. 우리는 사람을 보지 않고 헥터처럼 우선 그 사람의 배경만 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낸시는 그냥 낸시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차별은 선입견과 우리 머리 안 울타리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글로 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차별에 대한 생각을 머리 속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쉽게 우리와 떨어질 수 없으니 계속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누군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배경 때문에 싫어진다면 귀여운 낸시를 생각해보자. 만약 쥐 마을 사람들이 낸시를 고양이라는 이유로 바로 쫓아냈다면 쥐 마을 사람들은 귀여운 동생이자 마을 주민인 낸시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귀여운 낸시 이야기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