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성 Jun 09. 2022

큰 배일수록 멀미가 덜하다

빠른 세상과 느린 나

어렸을 때 멀미를 자주 했다. 가까운 거리를 가더라도 차에 타 시동이 걸리는 순간 바로 어지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에서 책을 읽은 탓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멀미가 났다. 차에 타기 전에 밥을 먹지 않는 노력을 해 보아도 멈출 줄 몰랐다. 운전하는 아버지는 멀쩡하셨지만, 어머니와 나는 고개를 숙이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멀미했다. 다행히 조금 더 크고 나서부터 괜찮아졌다. 엄마는 그맘때쯤 먹은 한약 덕분이라고 말했다.


멀미는 서로 다른 감각의 불일치 때문에 일어난다. 차나 배에 탔을 때 나타나는 멀미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와 몸에 있는 평행 기관의 정보가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때 기존 경험과 불일치하며 일어난다. 눈과 몸은 그동안 걸음을 통해 느리고 변동이 적으며 자의식으로 움직이는 경험을 해 왔다. 이때의 경험이 누적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면 예상치 못한 차량의 움직임 때문에 정보 불일치로 멀미가 나는 것이다. 배를 타도 예상하지 못한 파도의 움직임으로 평행 기관의 정보 불일치로 멀미가 난다. 


반대로 자신이 운전하는 차에 타면 자신이 예상하는 대로 차를 직접 움직이게 되니 뇌에서 이동을 예측해 멀미가 없다. 혹은 오랜 시간 동안 배를 타다가 땅을 밟은 사람들은 높은 파고가 평소 경험이 되어 버린 탓에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는 땅에서 멀미하는 “땅멀미”를 경험하기도 한다.


멀미가 나면 고통스럽다. 눈 앞이 빙글빙글 돌며 토를 하고 싶어진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조차 구토감을 일으킨다. 뱉으려 해도 혀가 입 속 어딘가를 자극해 무용지물이 된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눈알은 빠질 듯이 아프고, 덕분에 머리는 깨질 것 같다. 멀미약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멀미가 심할 때는 조금 증상을 완화해줄 뿐이지 어지러운 건 매한가지다. 시간이 약일 뿐이다.



자라고 나서 차에 타면 생기는 멀미는 사라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른 멀미가 생겼다. 마치 땅멀미를 하는 사람들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멀미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보는 세상과 내가 걷는 세상이 다른 탓이었다. 세상은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어린 시절 세상이 흐르는 속도는 너무나도 느렸다. 한 달은커녕 일주일이 지나가는 시간조차 느렸다. 일요일에 만나는 TV 만화를 위해 일주일을 버티거나 혹은 수요일마다 나오는 맛있는 급식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어린 나이에는 모든 경험이 새롭고 색다르니, 시간이 느리게 가는 탓이라고 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새로운 자극을 경험하는 순간이 적어지니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며 시간 역시 빠르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 비해 이제는 수개월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가 우습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내가 바쁘게 지나가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니 멀미가 났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 때문에 어지럽다.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싶어도 늦어지면 큰일 나는 듯이 재촉하는 주변의 시선과 세상의 속도 탓에 멈추지 못한다. 목적 없이 쳇바퀴 속에서 부유하는 삶이기에 뒤에서 밀어내는 나이와 삶의 흐름이 맞지 않은 탓이다.


큰 배일수록 흔들림이 덜해 멀미가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확실히 딛고 설 수 있는 나만의 땅이 거대할수록 멀미가 나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지나가고 세월이 화살 같아도, 내가 나일 수 있는 목적이 분명해야 휘둘리지 않는다. 작은 조각배 위에서 위태롭게 세월을 따라가려는 욕심을 내기보다는, 조금 느려도 흔들리지 않고 확실한 방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조금 어지럽고 흔들리더라도, 분명한 나만의 배를 완성해야 한다.


나는 과연 나로 살고 있는가.

작가의 이전글 귀여운 고양이 낸시와 차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