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 22시 51분 자이푸르 호텔
22시 51분 자이푸르 호텔
자이푸르는 그 어떤 다른 인도의 도시보다 깔끔하다. 오랜 시간 고통받던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릭샤꾼들이 몰려왔다. 우리는 내리자마자 우버를 부른 상황이었는데 우버로는 120 루피면 우리 호텔까지 간다고 했다. 그런데 릭샤 기사들이 들러붙어서 250에 가준다고 흥정한다. 우버 가격 보여주니까 그제야 더 깎는다. 우버 덕분에 편하게 승용차인 우버를 타고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한 우버 기사가 극동아시아에서 온 손님들이 신기한지 사진 같이 찍어달라고 해서 팁으로 사진 찍어주고 호텔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넓고 방이 좋다. 하루 있는데 이 정도면 매우 쾌적하다. 다낭에서 지내던 호텔 급이다. 호텔 체크인을 하는데 또 여긴 더워서 옷을 벗어두고 바로 밖으로 나섰다. 날씨가 감이 안 온다.
우리는 짐만 두고 하와 마살 쪽으로 걸어갔다. 하와 마살 쪽으로 다가갈수록 온갖 잡상인들이 가득했다. 작은 장식품부터 옷가지까지 안 파는 게 없는데, 식당은 도대체 보이지 않았다. 기차 타느라 배가 고픈데 먹을 곳이 없어서 계속 걷다 보니 하와 마살까지 걸어갔다. 분홍색 물결치는 하와 마살. 핑크 도시라 불리는 이유가 있다.
물결치듯 듯 넘실거리며 나온 창문 사이에 펼쳐진 화려한 조각들, 울렁이는 핑크색 파도의 건물. 압도적 크기와 색상에 놀라는 자이푸르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하와 마할이다. 인도에 대한 정보가 바라나시의 갠지스강, 타지마할, 그리고 카레 정도에 그친다면 조금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북인도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거진 거쳐가는 자이푸르의 명소다.
하와 마할을 유명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아름다운 핑크 빛 색상이다. 붉은빛이 바랜 탓일까. 분홍색과 붉은색 사암으로 만들고 석회로 마감 처리를 한 덕분인지 파스텔 톤의 분홍색이 가득하다. 사막에 가까운 탓에 탁한 모래의 색깔이 온 도시에 가득하지만, 하와 마할의 강렬한 인상은 웅장한 파도처럼 울렁거린다. 농담이 아니다. 말 그대로 울렁이는 모습이다. 거대한 건물 외벽에는 벌집처럼 창문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그 창문들이 각각의 발코니처럼 튀어나와 마치 물결치는 파도를 보는 기분이다. 덕분에 더욱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컴퓨터 그래픽처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어 보인다.
해가 저물어갈 때 즈음이 되니 분홍색이 더 반짝인다. 거대한 문 앞에 수많은 인도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는 하와 마살 바로 건너편에 카페 겸 식당이라는 간판을 보고 더 반가웠다. 밥 먹기 전에 환전부터 해야 했는데 할 만한 곳이 없어서 길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여기서는 힘들고 신디 캠프 쪽으로 가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 가게 구경하라고 또 꼬시길래 부리나케 도망쳤다. 환전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배고프니 식당에 들어갔다. 창문 건너에 하와 마살이 정면으로 보이는 멋진 식당이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식당이라 그런지 양식을 팔고 있었다. 오랜만에 커리가 아닌 피자, 파스타, 샐러드를 주문했다. 맥주를 식당에서 파는 건 불법이지만 몰래 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격이 꽤 나왔다. 500루피나 했다. 그래도 일단 주문해 봤다. 저런 멋진 풍경을 보고 맥주를 마시지 않을 수는 없으니. 가장 먼저 서빙된 샐러드. 오랜만에 신선한 채소를 먹었다. 한동안 채소를 안 먹으니 또 당겼다. 신선해서 기분이 좋았다. 양파가 특히 맛있다. 피자와 파스타는 기본적인 걸로 시켰는데 맛있다. 확실히 피자는 난을 파는 화덕이 있어서 그런지 화덕피자의 확실한 맛이 났다.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와 마살이 보이는 곳에서 식당을 해야 해서 그런지 메뉴뿐만 아니라 음식 맛도 굉장했다.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해서 그런가.
오랜만에 너무 맛있게 먹었다. 거기에 맥주 한 잔에 배부른 배까지. 완벽했다. 이렇게 먹어도 1500루피, 우리 돈 2만 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여태 쓴 돈이 평균 1인당 하루 3만 원 정도인데, 바라나시를 제외하곤 좋은 숙소에 좋은 레스토랑을 다녀서 그랬다. 만약 더 현지에 다가가서 밥 먹고 게스트하우스에서만 잤다면 하루 만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혼자 왔으면 그렇게까지 했으려나. 그런데 또 혼자였으면 오히려 무서우니 돈을 더 쓰고 안전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하와 마할은 특이한 창문의 생김새 덕분에 바람의 궁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바람이 부는 모습을 표현한 모습이라 생각했다. 파도가 치는 모습이나 바람이 부는 모습이나 모두 울렁이는 형상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의 궁전이라는 별칭은 건물의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잘 통하는 건물이라 생긴 것이었다. 더운 이 지역의 여름을 견디기 위해선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는데, 신기한 모양의 창문들은 작은 바람이라도 건물로 들어오면 쉽게 커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우리 같은 관광객들에게는 신기한 볼거리를, 당시 살던 귀족들에게는 시원한 여름을 제공했다.
하와 마할의 특이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창문의 구조상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으나 건물 내부에서는 밖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당시 봉건사회였던 이 지역의 왕가가 머물던 하와 마할에는 왕가의 여인들이 통제된 삶을 살았다. 밖을 나가지도 못하고, 남의 눈에도 띄어서는 안 되던 그녀들은 거대한 건물에 박혀 있는 작고 자잘한 구멍들로 밖을 보며 최소한의 숨통만 뚫고 살아갔다. 왕가에 속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더욱 구속된 삶을 살아야만 한 슬픈 사연이 만들어낸 특이한 건물이었다.
밥 먹고 나서 한층 더 올라가 옥상에서 점점 해가 저무는 하와 마살을 바라봤다. 화장하듯이 조명이 슬며시 비치니 더 멋있다. 한동안 바라보다가 해 지기 전에 좀 움직여야 하니 라씨 한 잔 하러 걸어갔다. 나오는 아무 데서나 먹어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큰 거리로 걷는데, 생각해 보니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인도(人道)로 걷고 있었다. 그동안 차와 소와 개와 오토바이와 하나 되어 걷기만 했는데, 자이푸르에는 인도와 신호등이 있었다. 조금 큰 도시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 더 쾌적하다. 길거리도 큰길에는 쓰레기도 그리 많이 없다. 만약 청결과 안전을 제일 생각하는 사람이 인도 여행을 해야 한다고 하면 자이푸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