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시 51분 자이푸르 호텔
22시 51분 자이푸르 호텔
자이푸르는 어디를 돌아다녀도 신비한 곳이다. 같은 인도지만 바라나시, 델리 같은 도시와는 또 다른 기분이다. 자이푸르는 자이푸르다. 사막 기후와 가까운 탓에 우리가 알던 인도보다는 중동 지방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그동안 보아 온 형형색색의 인도라기보다는 분홍 빛이나 노란빛의 파스텔 톤 건물들이 많다. 사실 자이푸르의 별명은 핑크시티다. 그만큼 모든 도시의 건물들이 분홍빛이 도는 건물이 많다. 19세기 영국 왕세자가 도시를 방문했을 때 환영의 의미로 모든 시내의 건물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는데 그때의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전통처럼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시장 안에도 통일성 있게 분홍색의 건물들이 조명 아래 빛나고 있었다. 동화 속 세상이라는 말이 진부하긴 한데, 진짜 슬슬 밤이 되니까 인도 동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해가 떨어지고 저녁이 되어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핑크시티 안쪽으로 갔다. 인도의 밤은 위험하다고 하기에 그동안 밤에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자이푸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덕분에 인도 와서 처음으로 밤공기를 마셔 보았다. 어두운 골목을 피해 환한 대로변으로만 걸어가니 경찰도 많고, 사람도 많아 다행이었다. 그동안 다녀본 다른 도시와는 색다를 정도로 깔끔하고 번화한 모습에 놀랐다.
가다 보니 어떤 바자르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자르도 생각보다 깔끔하다. 내부로 들어가니 분홍색 건물과 함께 휘황찬란한 조명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핑크 시티라더니 모든 건물은 분홍빛이라 시장 안 쪽 역시 분홍색 구름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시장의 생김새는 예전 동대문 시장과 비슷했다. 다만 연말 분위기가 풍겨 흥겹다는 점은 조금 달랐다. 확실히 이전에 봤던 시장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전의 시장들은 이색적이지만 우리네 시장과 닮았었다면, 이곳은 축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 신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돌아다니며 다양한 길거리 음식을 먹고 있었다. 또 어디선가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퍼져 나갔다.
걷다 보니 작은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조악한데 사람들이 흥겨워하니 우리도 흥겨워졌다. 이제 곧 설날이라 기념하는 작은 축제가 시장에 벌어지고 있었다. 슬금슬금 리듬에 둠칫 대며 걷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이런 축제나 춤바람이 있더라도 멀리서 지켜보는 이방인이었을 테다. 하지만 왠지 모를 기운이 우리를 끌고 들어갔다. 이 바자르 안에서 거의 유일한 낯선 관광객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주목을 끈 덕분인가. 그동안 많은 축제를 즐겨 보았지만,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신났던 적은 없었다. 한 인도인이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BTS 팬이었다. 가족들이랑 있는 학생이었는데 아빠가 우리한테 이 친구가 한국 너무 좋아한다고 하면서 같이 사진 찍어달라고 했다. 연예인이 된 기분이다.
우리는 한국에서는 하지 않을 춤과 노래로 (심지어 술도 마시지 않고!) 이 안에서 함께 즐기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한국에도 많은 축제가 있었지만 이렇게 함께 자유롭게 놀며 즐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축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행사는 많았지만, 대부분 축제보다는 전시, 박람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양한 부스와 행사가 있어 볼거리와 먹거리는 많았지만, 참여한 모두와 즐기진 못하고 혼자 혹은 함께 놀러 간 사람들과만 즐기는 전시회였을 뿐이었다.
축제의 개념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기에 이런 행사들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텔레비전으로 보던 축제를 가 보고 싶다는 욕망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분출되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사람들과 한데 뒤엉켜 춤과 노래가 온 감각을 자극하는 그런 축제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마치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체험이랄까. 현생에서 쌓인 모든 독을 빼버리고 해방감을 느끼는, 다시 말해 일상을 벗어나는 듯한 경험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시장 같은 축제로는 이런 경험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스페인 토마토 축제, 태국의 송크란 축제, 브라질 카니발 같은 참여형 축제를 동경했다. 대규모의 인원 속으로 들어가 나라는 존재가 옅어지고, 동시에 축제에 참여한 모든 인원들과 하나가 되는 소속감이라는 아이러니, 그리고 축제 속 사회 질서의 한정적 파괴에서 오는 해방감이 있는 그런 축제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머나먼 인도에서 축제로 현지인들과 하나가 되어 춤과 노래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즐기며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유명한 축제도 아니고, 대규모의 축제도 아닌 시장 안 신년 행사일 뿐이었지만, 모두가 즐거워하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축제가 가득한 시장을 걷다 보니까 놀이공원도 하나 나왔다. 놀이공원인지, 축제니까 미니 놀이공원이 세워진 건지 모르겠는데 안에 들어가니 한국 5일장이나 야시장 같은 분위기와 각종 놀이기구가 있었다. 대… 라기엔 그냥 소관람차, 바이킹이 조금 불안하게 삐그덕 거리며 서 있었다. 탈까 고민하다가 우리가 유튜버도 아니고 굳이 이런 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고, 모든 사람들이 유일한 한국인인 우리를 쳐다보길래 이목이 쏠릴까 봐 그냥 포기했다.
대신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녔다. 힘들어서 길거리 라씨집에서 라씨 한 잔 마시고 더 갈만한 곳이 없어서 숙소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이제 슬슬 밤이 되니 조금 무서워졌다. 조금 빨리 움직일걸. 상점들도 8시 가까워지니 문을 닫기 시작했다. 온 길 그대로 가는데도 길거리에 사람들이 슬슬 사라지니 두려웠다. 다행히 하와 마살 쪽으로 오니 사람들이 그래도 없지는 않았다. 걷다가 맥주 파는 상점이 있길래 호텔에서 마실 맥주 2병을 사고 인도에서 유명한 간식들도 조금 사서 숙소로 와서 먹고 있다. 기차에서부터 축제까지 기나긴 하루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