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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Oct 22. 2023

여행은 새옹지마

12월 31일 11시 15분 푸쉬카르 선셋 레스토랑

12월 31일 11시 15분 푸쉬카르 선셋 레스토랑

드디어 푸쉬카르다. 여기서는 처음 히터를 틀어줬다. 고마운 고빈다. 호텔 매니저 이름이 고빈다인데 유쾌하고 말이 많다. 히터 덕분에 그렇게 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추운 편이었다.


암베르 포트에서 나온 우리는 우버 불러서 숙소로 돌아갔다. 맡긴 짐을 챙기니 시간이 조금 빠듯했다. 그래도 간식 말고 밥은 먹어야지 생각이 들어서 하와 마살 쪽에 있는 케밥집을 갔다. 다음 목적지인 푸쉬카르는 신성한 도시라 고기 먹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어서 미리 먹어두려고 케밥을 선택했다. 레스토랑이 엄청 고급스러웠다. 금박이 번쩍이고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식기들도 고급스러웠다. 비리아니(볶음밥), 케밥, 그리고 롤을 시켜서 먹었다. 하지만 막상 먹으니 너무 짜고 자극적이었다. 향신료 향이 너무 강하고 염장한 듯 짰다. 후회되는 맛인데 심지어 비싸고 너무 늦게 나와 버스도 조금 늦을 듯했다. 



허둥지둥 먹어치우고 내려가 우버를 부르는데 5분이나 기다려도 이상하게 우버가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길래 취소하고 지나가는 오토 릭샤를 하나 잡았다. 하지만 퇴근 시간과 도로 공사, 도로 혼잡으로 결국 늦게 도착했다. 사실 인도인데, 기차도 3시간 연착하고 하는 나라인데 버스도 영화처럼 10분 20분 늦게 출발하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버스는 바로 떠나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냥 럭셔리 버스는 보내버렸고, 푸쉬카르 옆 도시로 가는 로컬 버스가 30분에 한 대씩 있길래 290루피 주고 탔다. 


겉으로 보니까 너무 고물이라 조금 의심하고 불안했다. 인도 버스에 대한 괴담도 있으니 더 무서웠다. 강도라도 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안락했다. 아줌마가 과자 같은 것도 주고, 짐도 아저씨가 올려주고 말도 거는데 이해는 못하고. 추워서 잠은 못 잤지만 멍 때리며 밖에 구경하다 보니 세 시간 조금 더 걸려서 도착했다.



도착하니 이미 밤이었다. 푸쉬카르로 가는 우버를 호출했는데 금방 도착했다. 하지만 우버기사가 푸쉬카르에서 올 때 손님이 없으니 200 더 달라는 고전적인 수법을 썼지만 방법이 없어 수락했다. 차 타고 오는 길은 엄청 험한 한계령처럼 도로 왼쪽은 낭떠러지고 오른쪽도 절벽이었다. 역시 우버 무시하고 그냥 오기에는 무리인 길이었다. 200 더 주길 잘했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가끔 역주행하면서 앞서가는 트럭 앞지르는 등 무서운 상황은 있었지만 눈 감고 죽으면 끝이다 생각하니 한결 나았다. 


다행히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고 오늘 태양도 만날 수 있었다. 하느님 부처님 맙소사. 인도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 이런 순간이라니. 저녁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달리던 기나긴 여정이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1층 카운터에 홀로 켜진 전등 하나만이 우리를 반겨줄 뿐이었다. 카운터 위에 있는 벨을 ‘땡’하고 눌렀더니 2층에서 헐레벌떡 사람 한 명이 뛰어왔다.


자신을 ‘고빈다’라고 소개하던 호텔 매니저는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느냐는 인사부터 시작해 어디를 돌아다녔냐 같은 우리에 대한 질문에 이어 작은 도시의 볼거리, 먹을거리, 축제, 주변 도시 등 끊임없이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는 오늘 밤은 추울 것이라며 올해 처음 산 히터를 우리에게 주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어 비닐조차 뜯지 않은 새 히터였다. 오랜만에 인도에서 따듯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 도시를 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긴 수다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에도 우리가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때그때 해결해주려 노력했다. 참으로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예약한 버스를 놓쳐 최악의 하루가 될 뻔한 날이 인도인들의 호의와 함께 최고의 날로 바뀌었다. 그동안 사기를 치는 사람, 무서워 보이는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따듯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온종일 그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정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소중한 인간의 정이었다.


밤늦게 도착한 호텔인데 호텔 매니저인 고빈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쉴 새 없이 말을 하며 뭐가 어디 있고 날이 추우니 히터 가져가고 이건 새 거고 새로 뜯었고 밤늦게 오느라 고생했는데 배 안 고프냐고 묻고 한국은 어떠냐 묻고 정신이 없었다. 



방은 작지만 꽤 괜찮았다. 화장실도 깔끔했다. 숙소에 루프탑이 있길래 구경하는데 루프탑이자 레스토랑이었다. 저 멀리 푸쉬카르의 작은 시내, 사실상 읍내의 불빛이 보이는 그런 루프탑이었다. 경치도 좋고 배고프니 앉아서 스패니쉬 크림 라자냐와 초면이라는 중국식 음식을 시켰다. 밤이라 자는 요리사들 깨우고 요리를 하는지 꽤 오래 걸렸지만 와이파이가 그 어느 때보다 빨라 오랜만에 휴대폰을 만졌다.


방금 전까지 버스를 놓쳐 우왕좌왕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편안하게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니, 참 즐거운 일이 있으면 힘들어지는 일이 생기고, 다시 극복하면 행복해지는 여행이다. 비단 인도 여행뿐만 아니라, 모든 여행이 그래왔다. 짧은 고통만 버티면 다시 행복해지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여행이다.


조금 있다 음식이 나왔다.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호텔도 싸고 괜찮고, 음식도 맛있으니 돈 있고 시간 있으면 꽤 오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기 좋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씻고 밀린 빨래 좀 하고 바로 잠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9시 정도에 눈을 떴다. 1년의 마지막날이니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돌렸다. 잊고 있던 한국이었다. 막상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 떠났는데 또 떠나오니 심심하고 그리워서 전화를 하게 되었다. 전화하고 상민이는 조금 더 자길래 혼자 호수 쪽으로 걸어가 봤다. 푸쉬카르는 이 호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도시였다. 호텔에서 호수까지 5분 정도 거리인데 호텔 앞에는 마른 하천이 호수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건대 호수 크기의 호수를 보고 돌아와 상민이 데리고 다시 호수 근처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호텔에서 먹어도 되지만 이왕 온 거 물 근처에서 먹는 게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여기 식당에 들어와서 도사, 모모, 매쉬드 포테이토, 토스트를 시키고 먹고 있다. 인도식도 좋지만 양식이 싸다. 전체적으로 싼데 양식이 싸면 가득 먹어 둬야지. 도사는 녹두전 느낌이 나서 신기하다. 모모는 맛있는데 찐 모모가 아닌 튀긴 모모였다. 안은 빠니르, 고수, 커리가 들어갔다. 이제는 고수가 먹을만하다. 매쉬드 포테이토는 치즈오븐이었다. 괜찮았다. 토스트까지 먹고 커피 기다리는 중이다.


14시 3분 루프탑 카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도시. 바로 푸쉬카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동안 방문한 그 어떤 도시보다 작은 마을이다. 건대 호수보다 약간 작은 호수 하나를 빙 둘러싸고 있는 동네다. 주변은 사막처럼 휑하고 모래바람만이 넘실거린다. 덕분에 호수 주변의 마을은 사막 속 오아시스처럼 작고 소중하게 빛난다.


오늘의 계획은 아무것도 없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으니 하루 쉬어 가는 날이 필요하기도 하다. 일상과 마찬가지로 여행 중에도 쉬는 날은 중요하다. 매일 같이 새롭게 쏟아지는 다양하고 행복한 자극으로부터 조금 멀어져야 한다. 그러고는 그동안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다시 되새김질하며 추억이 너무 빠르게 사라지지 않도록 기억하고 저장해야 한다.


예전에 유럽 여행을 할 때였다. 빠르게 다양한 도시를 다니려고 하다 보니 한 나라, 한 도시에 하루 이틀만 머무르기 부지기수였다. 그랬더니 많은 도시를 “지나갈” 수는 있었지만,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은 여행의 조각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나마 일기를 통해 간직한 추억은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희미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다. 어느 정도 집을 떠나 여행에 익숙해지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져 버렸다. 일을 하듯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새로운 음식을 먹으니 내가 취재를 온 것인지, 여행을 온 것인지 헷갈렸다.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러 떠난 여행이니 많은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때론 잠시 쉬어가며 지난 여행의 즐거움을 다시 돌이켜 봐야 한다.



커피 마시고 가트 주변 돌아보는데 소가 많다. 신성한 가트 옆으로 가려면 신발 벗고 내려가야 해서 그냥 골목으로 우선 향했다. 조금 걸어가니 큰 바자르가 나왔다. 바라나시나 자이푸르같이 큰 시장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이 작은 동네에서 가장 큰 시장에 관광객도 많다 보니 생각보다는 규모가 있었다. 대신 호객도 드물어서 좋긴 하다.


돌아다니다 보니 노년의 서양인들이 많았다. 한국인은 커녕 동아시아인들을 보기 어려웠다. 확실히 복지가 잘 된 유럽 지역에서는 은퇴 이후 연금으로 세계 여행하면서 다닌다더니 여행지마다 사이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보인다. 나도 언젠가 아무것도 안하고 저렇게 다닐 수 있을까. 


시장 쪽을 걷다 보니 어디로 가도 호수 근처 가트로 가는 길이 있었다. 푸쉬카르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호수 주변에 만들어진 도시이다 보니 어디로 가도 호수 근처에서 빙 돌게 된다. 그래서 이번엔 한 번 내려가 볼까 했는데 뿌자 하라는 호객이 너무 많았다. 영험한 기운이 있다고 조상신께 기도하라는 사람들처럼 계속 여기서 뿌자 한 번 해보라는 사람들이 많으니 귀찮아 밖으로 나갔다. 

가트 주변에는 원숭이가 많았다. 여기 원숭이들은 이전에 보던 원숭이들과 조금 생긴게 다르다. 이전에는 일본 원숭이처럼 얼굴이 붉고 털이 노르스름한 애들인데 여기 애들은 얼굴이 검고 털 색도 회색이다. 어떤 꼬마 아이가 원숭이에게 손으로 먹을걸 건넨다. 무섭지도 않나.


시장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 바퀴 돌면서 노트 3권과 지갑을 하나 샀다. 주변 사람들한테 선물로 줄 만한 걸 사고 싶은데 뭔가 작은 동상이나 조각은 조악하기도 하고 퀄리티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냥 델리나 공항에서 믿을만한거 사야겠다. 날이 조금 더워져서 숙소로 돌아갔다. 옷 벗어두고 사둔 짐 냅두고 나와 여행사로 갔다. 낼모레 자이살메르 가는 버스를 구해야 했다. 버스 티켓 산 다음 다시 걷다가 보니 어느 순간 오늘 벌써 10km 정도 걸었길래 다리도 풀 겸 카페와서 앉아 있다. 루프탑이 엄청 높다. 호수를 둘러싼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여유롭게 앉아 있어야지. 아따 신년 파티도 가야 한다.



16시 35분 루프탑 카페

아직도 카페다. 와이파이 잡아서 유튜브 보고, 애들하고 카카오톡으로 방송 하면서 새해 인사 나누고, 밀린 일기 다 썼다. 31일인데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할까. 저기 호텔에서 신년 파티를 하는데 인당 1200 루피란다. 우선 오늘은 여기서 커피와 차와 휴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생각보다 이런 휴식이 좋다. 아무것도 안하고 일기 쓰고 멍 때리고 글 좀 쓰고. 생각 없이 사는 재미.


볼거리도 많이 없는 평화로운 동네일 뿐인데 인기가 많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도시가 주는 분위기 덕분이다. 어떤 도시는 화려함을 뽐내며 흥분을 주고, 어떤 도시는 설렘과 즐거움을 기대하게 한다. 이 동네는 고요하게 쉬어감을 허락하는 동네였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에 휴식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언제나 비싼 돈을 내고 비싼 시간을 쓰고 왔으니 하나라도 더 보고 가야 한다는 압박 아닌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이 도시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또다시 압박받는 관광객들에게 ‘이봐, 조금 쉬었다가 다시 떠나는 게 어때?’라고 말을 거는 도시다.


잔잔한 호수만이 전부인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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