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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Oct 22. 2023

맨 발의 풍선 팔이 소년과 무대 위의 선글라스 소년

인도에서 대면한 빈부격차의 슬픈 단상

거리를 가득 메운 축제 공간 한쪽에는 작은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무대 위를 가득 메웠다. 사회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아이들과 인터뷰를 하면 무대 아래 부모와 관객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한국에서도 축제가 열리면 가끔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세 살에서 다섯 살로 보이는 아이들은 곧이어 무대 위에서 귀엽게 춤을 췄다. 가장 열심히 추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기로 약속을 했는지 아이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 그 짧은 팔과 다리를 흔들었다. 한 소년은 선글라스에 가죽 자켓을 입고 춤을 추었고, 무대 아래에서 부모들은 신나서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춤추는 무대 옆에는 화려한 풍선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고사리 손으로 풍선 파는 소년이 풍선을 반주에 맞춰 흔들면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다시 풍선을 팔아야 한다는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풍선을 사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무대에서 춤추는 아이의 모습을 녹화하던 한 아빠는 아내에게 계속 녹화할 수 있도록 스마트폰을 넘겨주고 풍선 파는 소년에게 풍선 하나를 샀다.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지만 받은 돈을 한 손에 꼭 쥐고는 다시 무대를 아련히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소년을 바라봤다. 추운 날이었지만 흔한 외투 하나 없이 얇은 긴 팔 셔츠만 입고 있었다. 소매와 바지에는 구멍이 뚫려 바람이 통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추운 날임에도 운동화는커녕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화려한 축제 속 숨어 있던 불편한 진실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장면이었다. 안데르센의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는 자신의 소원을 담아 성냥에 불을 붙였다. 성냥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소녀가 원하던 따듯한 집, 푸짐한 식탁, 그리고 유일한 사랑의 존재인 할머니가 나타났다. 풍선을 팔던 소년은 성냥을 긋지도 않았지만 같은 또래의 행복한 삶이 두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인도의 빈부격차는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당연하다는 듯이 드러나 있었다.




신흥 개발국의 고도성장과 영어 사용, 저렴한 노동력 등 다양한 이유를 갖춘 인도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그만큼의 낙수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의 기본 권리를 위한 복지나 교육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아직 빈민가가 도심 속에도 존재했다. 결국 빈민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제대로 된 의료, 복지, 교육 등 국가 발전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일을 하거나 동냥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아이들을 이렇게 안타까운 현실에 놓이게 한 부모들 역시 죄를 묻기는 힘들다. 그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려 탓할 수 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이런 사회의 문제는 너무 많은 것들이 문제라는 문제다. 교육 불평등, 카스트 제도, 인종차별, 종교 갈등 등 다양한 문제들이 산재하고 있으니 해결의 구멍이 보이지 않아 더욱 암울한 현실이었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빈부격차로 인한 시작점도 다르지만 나아가 성장의 기울기조차 큰 격차로 벌어지니 가난의 대물림은 끝나지 않는 굴레였다. 극복하지 못할 가난은 없다 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기 서 있으면 정말 극복하기 위한 길조차 보이지 않는 가난에 말을 잃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축제 속에서 만난 이런 슬픈 장면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풍선을 파는 소년도, 무대에 오른 잘 차려입은 아이들도, 그들의 부모도 아닌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오히려 사회 밖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니 사회가 가진 부조리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나에게 보여주는 부조리 연극의 한 장면인가 하는 착각 아닌 착각도 들었다.


이 화려한 축제 속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문제이니 나 또한 문제 삼지 않아야 하지만 괜히 있는 체하는 교조주의적 집착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심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지만 단순한 동정으로 주는 동전 몇 푼 말고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니 더욱 작아졌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연민마저 사치스러웠다.



누군가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을 한 개라도 사 줬더라면 그날 밤 소녀는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가야만 했다. 소년의 풍선을 하나 사 주었더라면 순간은 좋았을지라도 굴레를 벗어날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풍선 팔이 소년으로 만난 인도의 빈부격차 이외에도 여행을 하며 아동 노동, 사라지는 전통들, 천민자본주의 등 산재한 수많은 문제들을 만났다. 어찌 보면 인도 여행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이런 것이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고, 해결책을 도저히 생각해 내지 못하더라도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 성냥이 다 닳고 소녀는 끝내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소년이 팔던 풍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소년이 가진 풍선은 희망이나 꿈과 같은 달콤한 것이 아닌 치열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풍선이 사라지기 전에 소년에게 희망이 생겼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더욱 힘든 세상이 다가왔지만 여전히 그 소년의 풍선이 터지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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