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손목시계

by 김단이


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감고 선풍기를 틀어놓은 뒤 침대에 누웠다. 하루 동안에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 것처럼 상쾌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켜서 그것들이 소리를 질러내는 듯 머리가 아팠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이명이 들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고 지금 자버리면 분명 새벽에 깨어 잠을 설칠 것이 뻔했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긴 했지만 크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냥 온몸에 힘이 없었다. 누워있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자 난 대번에 서글퍼졌다. 이유 없이 우울해지는 날엔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라고 나는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글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난 여태까지 뭘 떠안고 살아왔던 걸까. 오늘, 그 집엔 도대체 왜 간 것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유년 시절의 나를 추억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를? 아님…언니?


난 누웠던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엔 빼빼 말라 눈 아래 그늘이 진 초췌해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가 서 있었다. 허리를 굽혀 얼굴을 거울 가까이 대고 여기저기를 비춰본다. 그리고 다시 차렷 자세로 거울 앞에 서본다. 내 머리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단발이었다. 이 단발만 빼면 난 언니의 모습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똑 닮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보다 언니가 더 예쁘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직접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건 충분히 눈치로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를 질투한 적은 없었다. 나도 그만큼 언니가 좋았다. 젓가락처럼 빼빼 마른 나와는 달리 언니는 날씬하면서도 탄력 있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얼굴엔 항상 생기가 넘쳐흘렀다.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는 청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 기억 속 언니는 언제나 그렇게 예뻤다. 그냥 그런 언니가 부러웠다. 언니랑 난 두 살 나이 차가 났지만, 우린 그만큼 친하게 지냈고 언니는 마치 날 친구처럼 대했다. 자기와는 반대로 침울한 표정에 말이 없는 나를 어딜 가던지 항상 데리고 다녔고 언제나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좀처럼 웃지도 않는 나는 그런 언니 곁에서만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니에게만 내 고민거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어려웠던 그 시절, 내게 언니 없는 세상은 지옥이었다.


거울 앞에 서 있던 나는 서랍장 쪽으로 걸어가 첫째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에 넣어 두었던 머리핀, 고무줄, 열쇠고리, 증명사진들, 다 쓴 펜들이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찾으려는 건 그보다 더 오래전에 깊숙이 넣어놨기에 쉽게 꺼낼 수 없는 것이었다. 섞여 있는 물건들 때문에 서랍이 끝까지 열리지 않아 아예 물건들을 모두 들어내고, 첫째 서랍장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무거운 그것을 겨우 꺼내어 방바닥에 내려놓고 뒷면에 쌓인 물건들을 차례차례 꺼냈다. 그리고 찾으려던 것을 드디어 꺼내놓았다. 직사각형 모양의 선물상자. 선물상자를 찾긴 했지만, 뚜껑을 열어 볼 용기가 나진 않았다. 난 선물상자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 꺼내놓았던 서랍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앉아 선물상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초록색 바탕의 조금은 낡은 듯 보이는 선물상자를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렸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 손을 뻗어 선물상자를 흔들어보았다. 안의 내용물이 상자 벽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 선물상자의 뚜껑을 열면 보고 싶은 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항상 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았던 거야. 그냥 내가 무얼 하던 언니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언니에 대한 회상을 일부러 할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야. 지금도 언니는 나랑 같이 내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 같으니까. 절대로 그 사람만 기억하고 있었던 게 아니야….


선물상자를 한 손에 쥔 채 난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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