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
97년도 여름, 밤하늘 아래 그네를 타고 있는 나는 단발머리의 열일곱 살 소녀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 나는 항상 이 시간이 되면 그네에 앉아 있었다. 발끝으로 흙을 까발리며 누가 밀어주지도 않는 그네를 오래도록 타고 있는 내 얼굴은 발밑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밤마다 그네를 타고 있는 나는 외로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집에 갈 용기는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학교가 끝나자마자 일찍 책가방을 챙겨 들고 뛰쳐나오곤 했지만, 그들과 마주치지 않고 집에 먼저 도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렇게 일찍 나와도 끝에 가서는 결국 그들과 마주쳐야 했다. 이건 나에게 힘든 일이었다. 수줍은 듯 손가락만 겨우 포개고 걸어오는 그들 앞에 서면 내 가슴은 무언가로 덩어리진 것이 사무치듯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당황스러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언니와 그는 나를 마주치면 항상 반갑게 인사했다. 다만 집 앞에 와서는 둘 다 나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먼저 집에 들어가 주길 바랐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먼저 집으로 들어갔지만, 방 안에 책가방을 놓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내 가슴은 또다시 미어졌다. 그들은 집에 돌아올 때 항상 똑같은 방향으로만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운이 좋으면 그들을 뒤를 자연히 밝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난 그들이 내가 뒤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숨죽여 걸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그들의 애정행각을 뒤에서 고스란히 보아야만 했다. 그것마저 괴로웠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들의 뒤를 밟게 되었을 땐 조용히 아파트단지에 있는 놀이터로 향했다. 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그들이 이젠 각자 집에 돌아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집으로 가곤 했다. 그러다가 이젠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교실에서 뛰쳐나오는 것도 귀찮아져 그 커플을 본 날이 아니어도 아예 처음부터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가 귀가하게 되었다.
그와 언니, 그리고 나는 어렸을 적부터 소꿉친구였다. 언니가 집 밖으로 나가 놀 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주택가에서 우연히 만난 동갑의 남자아이가 그였다. 우리가 사는 이 주택가엔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같이 뛰어놀 친구를 만들려면 길을 두 번이나 건너서 아파트단지에 가야 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아파트단지까지 가기엔 길은 너무 위험했고 엄마들은 그곳까지 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언니와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가 되어 곧잘 붙어 다녔다. 언니는 가끔 그와 처음으로 친구가 되었던 때가 생각난다며 즐거운 듯 말하곤 했다. 주택가의 띄엄띄엄 놓인 벤치엔 할머니들만이 간혹 수다를 떨면서 멀뚱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고. 그저 심심해서 우리가 살던 동네를 몇 바퀴 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문방구 옆에서 전엔 보지 못했던 어떤 남자아이가 한 손엔 돋보기를 쥔 채 개미를 태우며 놀고 있었단다. 목뒤에 땀이 흐르도록 무얼 그리 열심히 하나 궁금해서 다가가 구경하는데, ‘대뜸 너도 한번 해볼래’라며 그가 말을 걸었다. 이게 그들의 첫 만남이었고 그들은 그 후 매일 만나서 개미를 태우거나 나뭇잎과 돌을 주워 모아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그러다 엄마들끼리도 알게 되어서 가끔 서로의 집에 놀러 다니기도 했다고…. 그때 나는 두세 살 정도 되었을 테고 그와 나는 우리 집 안방에서 처음 만났을 것이다. 비록 난 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나지도 않지만 나도 뛰어다닐 수 있게 되자 그들의 놀이에 끼게 되었고 우리는 항상 함께 놀았다. 그래서인지 그를 떠올리면 언니처럼 언제나 내 곁에만 붙어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언니와 그가 3학년일 때 난 1학년이 되어 우리는 학교 안에서도 쉬는 시간마다 함께 놀았다. 그건 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언니와 그는 중학교를 졸업해버렸지만. 그러나 그 이후 언니와 그는 고등학교를 따로 다녔다. 언니는 버스를 타고 여고를 다녔고 그는 아파트단지에 있는 남녀공학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제 더 많은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고등학교 입학식 날 언니와 내 앞에서 자랑하던 그는 언니의 속마음을 은근히 떠보았던 것 같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언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원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몰래몰래 째려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