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손목시계

by 김단이


그렇게 그와 언니가 사귀게 된 지 2년이 지나 난 열일곱 살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저녁도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아파트단지에 있는 놀이터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미 그네에 교복을 입은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언니였다. 난 주위에 그가 있을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니만이 고즈넉하게 그네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언니의 등 뒤로 다가가자 언니는 이미 내가 올 것을 알았다는 듯 날 한 번 올려다보더니 옆에 있는 그네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어젠 조퇴하고 일찍 집에 왔었어. 몸이 안 좋아서…. 쉬고 나니까 좀 괜찮아져서 너 학교 마칠 시간에 너희 학교에 갔었는데, 네가 다른 아이들보다도 늦게 나오더라. 그런데 네가 날 못 보고 우리 집 반대 방향 쪽으로 가더라고."


"…."


날 바라보며 힘없이 말하는 언니를 보고 있자니 무안했다. 내 비밀장소를 들킨 것 같았다. 언니는 내가 이 그네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걸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언니는 내게 그네를 밀어달라고 했다. 난 뜬금없었지만, 언니의 얼굴이 하도 우울해 보여서 해달라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언니는 요새 며칠 전부터 밥도 잘 먹지도 않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난 언니의 눈치를 살피며 내 앞으로 오는 그네를 밀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언니가 말을 걸었다.


"가장 소중한 걸 잃은 것 같아…거기에다 말도 안 되는 짐까지 떠맡아 버렸어. 아주 엄청난걸. 내가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무서워."


난 묵묵히 그네를 밀기만 했다. 언니는 자기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난 그런 언니를 내버려 두었다. 사람이 우울할 땐 혼자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도록 두어야 한다는 것이 내 철칙이었다. 난 언니가 없을 때면 항상 그런 식으로 우울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지금은 언니가 아파서 헛소리하는 것이리라. 언니는 그냥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집에 가자는 내게 언니는 “그래”라고 대답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나보다도 한 걸음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 그런 언니의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저녁엔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데도 언니는 아직도 하복을 입은 채였다. 스타킹도 신지 않은 채. 가녀린 언니의 손목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평소엔 답답하다며 손목시계는 차지 않던 언니가 왜 시계를 차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언니가 조금, 아니 많이 걱정될 뿐이었다.


언니는 그 후로 며칠간 아무 미동도 없이 조용히 지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언니는 자기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뚜렷하게 달라진 점은 더 이상 언니에게서 그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일 등교 시간마다 그는 우리 집 앞에 와서 언니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이젠 오지 않았고 집에 올 때도 언니 혼자 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언니에게 풍겨 오는 그의 향기도 이젠 나지 않았다. 그제야 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언니와 그가 헤어진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그와 언니가 헤어졌다는 것은 어쩌면 내겐 기쁜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영 이상했다. 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무기력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그들이 헤어질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난 언니에게 그에 관한 일은 물어보지 않았지만, 언니를 대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언니를 곁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저번에 놀이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보았던 손목시계가 계속 언니의 손목 위에 채워져 있는 것이었다. 언니는 목욕하러 욕실에 들어갈 때도 손목시계를 차고 들어갔다. 잘 때도 손목시계를 차고 잤다. 몰래 언니의 손목시계를 풀어볼까 생각해도 봤지만, 언니가 깰까 봐 그러지 못했다. 난 언니가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것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이상하게만 생각되었다. 요즘 왜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느냐고 물으면 “시계를 사 놓고 계속 방안에만 놔두기 아까워서”라는 심드렁한 대답만 들려왔다. 그와 헤어진 것과 손목시계가 연관이 있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난 별생각이 다 들었고 언니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자 답답했다. 언니가 옆에만 있으면 계속 언니의 손목으로만 시선이 쏠렸다. 그러다 언젠가는 이상한 것을 본 것도 같다. 언니의 손목시계의 가죽끈에 뭔가 불그스름한 것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스쳐 지나간 것이라 잘못 본 듯싶었다. 다음에 다시 살펴봤을 땐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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