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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이 Sep 11. 2023

고양이도 흰머리가 난다

열한 살 고양이 로이 할아범 :) (현재)



 우리 집엔 열한 살 된 고양이가 있다. 이름은 로이. 10년 전,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선물처럼 우리 집에 온 고양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나도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허겁지겁 1년 휴학계를 내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때였다. 그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래서 로이와 나는 나이가 늘 같이 간다. 내가 스물다섯 살이 되면 로이도 열다섯 살이 되었고, 내가 서른 살이 되면 로이도 스무 살이 되었다. 살아온 나이로 치면 로이는 이제 열한 살이지만, 사람 나이로 치면 예순이다. 예순…. 뽀짝뽀짝 뛰어다니던 로이는 이제 할아버지가 다 되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냉장고와 장롱 위로는 폴짝 뛰어오르지 못한다. 영락없는 할아범이 되었다. 로이 할아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회사에서 나는 ‘서브 팀장’이라는 직위로 일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경력도 없었던 스물한 살인 나에게 그런 직위를 덜컥 맡겼다는 것이 다소 놀랍긴 하다. 그러나 그 시절엔 그냥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금세 내 밑으로 대여섯 명 되는 부하직원이 달리게 되었고, 그들 대부분은 여직원이었다. 다들 나보다는 6살 정도 나이가 많았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남직원이었는데,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한 28살로 로이의 첫 주인이었다. 어느 날 그에게서 길고양이 구출한 썰을 처음 들었었다. 다른 길고양이에게서 왕따 당하는 고양이가 있다고. 맨날 다른 고양이들에게 얻어맞고 다니는 앤데, 고양이들 텃세에 사람이 주는 음식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해 빼빼 말랐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가엾게만 여기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가 밤만 되면 본인 반지하 자취방 창문 앞에서 새벽이 올 때까지 쉬지 않고 울어댔다고…. 삼일 밤을 울어대기에 결국 그는 친구와 그 고양이를 구출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구출’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바로 앞에서 간식을 흔드니 그냥 쫄래쫄래 따라왔단다. 처음 집에 데려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꼬리에 미용이 되어있는 것이 집을 나왔거나 누가 버린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고양이에게 ‘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외국 어느 작가의 이름이라고 했는데(그 남직원은 문학에 굉장히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실 거기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어느 작가인지는 까먹었다. 처음엔 그가 길고양이를 데려와 키우는구나, 정도의 관심이었다. 사실 동물을 좋아하고 특히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사진 구경만 실컷 했었다. 그런데 로이는 정말 누가 보아도 미묘였다. 남아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속눈썹이 긴 고양이. 아무튼 그는 날마다 로이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고는 했다.



낮이고 밤이고 남의 집 창밖에서 울어대는 길냥이 시절 꼬질꼬질한 로이


구출 후 남직원의 자취방에 처음 오게 된 로이(꼬리에 미용이 되어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퇴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내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부모님 댁에 들어갈 생각인데, 부모님이 고양이를 무척 싫어하셔서 지금 로이의 새 주인을 찾고 있다고. 동물 키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엄마를 떠올리면 평소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로이는 우리의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그날 집으로 돌아간 나는 용감하게(?) 엄마에게 로이를 데려오자고 설득했다. 당시 집안은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았다. 결혼하고 나서 20년 이상을 주부로만 살던 엄마는 마트의 캐셔로 일하던 중이었다(나중엔 돈을 더 벌기 위해 호텔 메이드로 직업을 변경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엄마는 스트레스를 이기기 힘들었는지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히스테리를 부리며 벽에다 핸드폰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한 3년 전부터 집 안에 있기가 어려워진 나도 당시 퇴근만 하면 밖으로 나돌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동생은 하교 후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혼자 집을 지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동생이 있는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싶지만, 그때 나도 제정신으로 살 수 없던 때였으니 아무튼 변명하자면 그렇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고양이를 데려오자고 말했더니 엄마는 한두 번 거절하다가 잠시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엄마는 주말도 쉬지 않고 마트에서 밤 10시까지 서서 일했다. 쉬는 시간도 30분가량이었고, 옆 캐셔에게 부탁하고 잠시 화장실만 다녀올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엄마는 자주 몸살이 났고, 몸의 아픔을 잊기 위해 술을 더 자주 마셨다. 그러다 어느 주말에 엄마는 앓아누웠다. 이런 일이 꽤 잦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 옆에서 엄마를 간호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동생은 도서관에 갔는지 집에 없었다. 자다 깨다 반복하던 엄마는 내가 옆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뜬금없이 나에게 물었다.


 “고양이가 오면 집 안 분위기가 달라지겠지?”

 “…그렇겠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난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며칠 뒤 엄마는 로이를 데려오라고 말했고,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내가 고양이를 키우다니! 뒤늦게 알았지만, 엄마는 중학생이던 동생이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고양이라도 같이 집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내가 로이 얼굴을 뚜렷하게 본 건 택시 안이었다. 남직원은 이동 가방에 로이를 실은 채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우리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를 탄 로이는 무서운지 광광 울어댔는데 택시 기사가 본인도 고양이를 키운다며 괜찮으니 고양이를 꺼내서 달래주라고 배려해주었다. 덕분에 로이 얼굴을 그때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남직원이 내게 로이를 안겨주길래 엉겁결에 안았는데, 로이는 내 눈을 마주하며 꿈뻑꿈뻑 눈인사했다. 그땐 몰랐는데 택시 기사가 이게 고양이들의 ‘눈 키스’라고 알려주었다. 고양이가 인사하는 방법이라고. 얌전한 편이라고 줄곧 들어왔었지만, 내게 가만히 안겨 있는 로이는 완전 순둥이였다.



 새 주인과 고양이가 참 닮았네요. 둘 다 순둥순둥해 보여.



 집까지 달리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택시 기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로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에게 폭 안겨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하니 택시 기사는 고양이 잘 키우라며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남직원도 로이와 잠깐 둘이서만 마지막 인사를 나누더니 곧 내게 안겨주고 떠나갔다. 그 후로 그와는 로이 사진을 간혹 주고받았지만 끝내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로이는 훌륭한 고양이였다. 우리 네 가족은 서로를 많이 어색해하기도 했지만 로이는 금세 우리 집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 구성원이 되었다. 로이가 오고 나니 엄마는 이제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았고, 나 또한 집에 일찍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다. 로이는 우리 집 분위기를 뒤바꿔준 장본인이었다. 무엇보다 남직원은 로이가 애교가 없는 편이라고 말했었는데 로이는 우리 세 여자에게 굉장한 애교쟁이가 되어있었다. 엄마는 이제 두 딸보다 고양이 아들을 더 많이 챙긴다.



집에서 늘 로이와 함께 하는 동생과 엄마ㅎㅎㅎ



 세월이 흘러 로이는 열한 살이 되었다. 1년 전부터 로이는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난 이게 흰머리인 줄도 몰랐다. 고양이도 나이가 들면 흰머리가 생긴다는 것을 로이 때문에 처음 알았다. 찾아보니 고령의 고양이들에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로이의 흰머리를 보니 엄마도 그렇고 나도 퍽 슬펐다. 우리에게 정말 많은 걸 선물해 준 로이인데,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날도 머지않았다니…. 우린 많이 아프지 않기 위해 조금씩 로이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래도 로이 얼굴을 보면 할아범 같진 않다. 여전히 한 살 아깽이이던 시절 그대로의 얼굴이다. 로이는 지금도 우리에겐 아기일 뿐이다.



당시 우리 집에 온 후 함께 2년의 시간을 보낸 로이(약 7년 전?)


 로이가 사람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넌 지금 행복하냐고. 이건 미안한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해주고 싶다. 없는 집에 데려와서 미안하다고…. 캣타워도 없는 심심한 작은 집에서 꽤 오랜 시간 혼자 두며 살아서 미안하다고.


 지금도 로이는 우리 가족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런데 사람은 영 그렇지 못해서 미안하기만 하다. 그래도, 언제가 마지막 부탁이 될지 모르니 욕심껏 말해보고 싶다. 우리랑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P.S. 로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자면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서 쉽사리 고양이 로이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그러다 웬일로 로이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우리 집이 걸어온 여정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사실 제목처럼 로이에게 ‘흰머리’가 난 이야기를 쓰고 싶었었는데, 어쩌다 보니 로이의 흰머리보다도 우리 집 이야기가 담긴 글이 되었다. 나도 2년 전인가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제 이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은 시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남긴다.



할아범이어도 사랑해!!♡
나이 들어도 미모 여전해~~ :) ♡



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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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도 흰머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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