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헐렁하게 일해온 지 이제 5개월 정도가 되어간다. 기회가 되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와 소일거리를 받아서 일했다. 무엇보다 10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결혼 준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여유를 되찾은 지 이제 겨우 한 달이다. 물론 그동안에도 청첩장 모임을 하느라고 굉장히 바빴고 틈새 몸살을 앓기도 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들이라 하더라도, 극 내향형인 내가 한 달 동안 25개의 약속을 나가는 건 충분히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근황을 나누며 깔깔대다가 헤어지면 밤늦게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다. 이제 결혼 전까지 열 몇 개의 약속만 남았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편으론 가까운 미래를 준비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 여행을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다시 일거리를 찾아봐야지. 지금으로선 취업을 준비하기에 매우 애매한 시간이었으므로 결혼 전까지는 충분히 여유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구인 사이트를 여유롭게 돌아다니던 중 괜찮은 공고 하나를 보게 되었다. 우선 지원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정성껏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업데이트하고 지원 메일을 보냈다. 이틀 정도가 지나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이젠 면접 또한 그다지 떨리지 않는다. 혹여나 합격 연락을 못 받는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건 없었다. 단순히 결혼을 앞두고 있기에 ‘떨어져도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20대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미 수많은 면접을 경험해왔다. 그간 겪어왔던 수없이 많은 ‘불합격’은 30대 초반의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설사 합격하여 얼마간 그 기쁨을 누리더라도 그 회사 또한 나의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래도 면접장에 도착해서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면접관들과 마주하고 한 시간 반가량의 면접을 시작했다. 면접관은 회사의 대표와 직원 두 명이었다.
압박 면접은 아니었지만, 면접이란 게 늘 그렇듯 쉬운 질문만 있지는 않다. 최대한 설득력 있게 내가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침착하게 답변했다. 그러다가 대표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경력관리가 엄청 안 되어 있는데, 자기 확신은 있는 게 고집 있어 보이네요.
처음, 이 말을 듣고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띠용~!”이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나쁜 말인가?’
경력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는 건 어쩌면 사실이었다. 대학 시절, 부모님이 별거하시면서 나는 물불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다 내가 벌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졸업 후에도 당장 눈앞에 있는, 오랫동안 다닐 수 있는 일을 찾아 입사하곤 했다. 물론 내 나름대로는 전공과도 결이 맞고 내가 잘하는 분야에서 비슷하게 일을 찾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세부적으로 경력관리를 시작한 것은 20대 후반부터였다. 그러니 연륜 있으신 분들이 보기엔 나는 경력관리가 엉망인 애송이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대표님의 저 말씀엔 뭐라고 대꾸할 순 없었지만, 그저 미소를 짓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저 문장이 면접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쉽사리 이해되지도 않았다. 면접이 끝난 후 ‘불러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에도 저 문장은 계속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쁜 말이겠지…?’
나쁜 의미로 한 말인지 그 반대인지 가려내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듣기에 좋은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그분이 좋지 않은 의미로 넌지시 건넨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좋은 의미로 해석된다는 이 사실이 지금 나에게 커다란 만족감이 되어 나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의 나를 잘 안다. 약 10년 전. 아, 아니, 그렇게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어. 한 4, 5년 전…. 그때의 나는 자기 확신조차 없었다. 나는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타인이 보아도 내가 자기 확신이 있어 보인다니!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경력관리가 엉망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한 치의 스크래치도 주지 않았다. 현재 엉망인 것을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마법사가 되어 지금의 경력을 수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실에 후회하고 기죽어 있기보다 지금처럼 열심히 문을 두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걸 안다. 무엇보다 남들이 보기에 엉망일지 몰라도, 나는 그 엉망인 경력을 쌓아오면서 인생을 배웠고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장착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누가 보아도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최근에 알았다. 이건 나의 생각이었다. 물론 나를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늘 ‘넌 정말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 진국이다’라고 말해주었지만, 난 사람이라면 스스로 객관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나 스스로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조금은 늦게 알았다. 뭐, 빨리 알았으면 좀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다지 상관없었다. 이제야 나 스스로를 정확히 알았다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이젠 그걸 넘어서 자기 확신까지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니!
이 문장이 주는 힘으로 며칠을 더 콧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여전히 사람을 만나고 노력하고 두드려야 한다. 살아나가야 한다. 좋은 미래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면 조금 더 자기 확신에 차서 살아갈 수 있을까? 왠지 지금으로선 그럴듯하다. 그러나 선명하지 않아서 나는 지금도 더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손으로 더듬어가며 인생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노래 부르듯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며칠 더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