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목시계

by 김단이


6년 전, 짝사랑만 해왔던 스물여섯 살의 나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잘 알던 친구의 소개였다. 친구와 밥을 먹고 시내를 거닐다가 어쩌다 만나게 된 그 남자가 날 맘에 들어 한다고 친구가 말했다. 그리고 난 친구의 재촉에 못 이겨 남자를 만났다. 큰 키에 다부진 어깨를 가진 남자를 마주하면서 어쩌면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남자는 손목시계를 향한 내 반응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점이 제일 맘에 들었다. 그는 그저 내가 자신의 손목시계에 관심을 보인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정식으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형식적인 몇 마디를 나누다가 난 그 남자가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도 모르게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내 시선을 알아채곤 “아, 이거요.”하며 자연스레 손목을 돌려 시계를 보여주었다.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이 선물해 주셨어요.”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혹시 내가 손목시계를 차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망설이지 않고 손목시계를 풀었다. 한 손으로 시계를 받아든 나는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내 앞에 앉은 그는 다소 놀란 듯 보였다. 마찬가지로 크게 당황한 나는 그의 손목에 뭐가 묻었다고 말하고선 어물쩍 손목에 그의 손목시계를 차보며 멋지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어색하진 않았겠지? 마음 같아선 그의 손목을 잡고는 그 아래 피부를 자세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선 주말에 다시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그 후로 우린 자주 만났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전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난 그가 대번에 편하게 느껴졌다. 이건 실수였다. 그의 생김새나 마음 씀씀이도 마음에 들었지만, 나에게 손목을 쉽게 보여준다는 이유로 난 그가 어느새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만날 때마다 그에게 손목시계를 보여 달라고 했다. 한두 번은 그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계를 건네주었지만, 그 후로 그는 손목시계를 차고 오지 않았다. 세 번째 만남에선 그가 손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을 때 나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남자는 다시 흠칫 놀랐고, 난 나도 모르게 이번엔 꽤 오랜 시간 그의 팔을 감싸 쥐고 여기저기 쓸어보며 손목을 관찰했다. 곧 그는 내게서 팔을 뿌리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날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손목에 또 뭐가 묻었어요?”


그의 질문에 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손목시계를 차고 오지 않았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우리는 다시 첫 만남에서처럼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난 그가 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손목시계를 풀고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손목시계를 풀고 오는 것을 잊은 것이다. 난 그가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온종일 그의 손목을 보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가 좋아지고 있었다. 겨우 좋아진 사람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난 계속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물어보는 말에도 성심성의껏 대답했고, 나도 그에게 말을 걸어주며 그가 내게 해주는 것처럼 나도 그를 바라보고 웃어주었다. 나의 노력은 그와 함께 술을 마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주 세 잔 정도가 주량인 나는 이성을 잃지 않도록 온 정신을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술을 잘 못 마신다는 걸 알았던 그는 억지로 내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난 그가 얼큰하게 취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술을 마시고 난 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내 자취 집까지 날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많이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한껏 들떠 있었고 난 그런 그에게 어차피 근처이니 오늘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난 무서웠다. 술에 취한 그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손목시계와 손목에 관한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내가 무서웠다. 난 그를 어서 떠나보내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손목시계에 대해서는 그만큼 애착이 강해지는 것일까…. 어느 순간 참고 있던 욕망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난 그의 손을 잡고 빠르게 걸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빠르게 도착한 집 앞에서 난 그와 헤어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내게 잘 가라고 인사를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그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어서 그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발걸음을 떼려 하지 않았다. 자꾸 무언가 말을 걸었고 어두운 골목의 눈치를 살피는 듯 계속 두리번거렸다.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전과는 다르게 그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엔 그가 어서 집으로 갔으면, 하는 생각밖엔 없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거리에 계속 시선을 던지던 그가 갑자기 내게 입을 맞췄다. 머릿속에 다른 생각만 가득 들어차 있던 터라 깜짝 놀랐지만,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손목시계에 관한 생각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입맞춤은 길었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 쪽에서 먼저 입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혀가 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마구 뒤엉키는 혀들 속에서 그와 난 조금씩 거칠어졌다. 안 그래도 손목시계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손은 내 목에서부터 어깨를 타고 내려와 내 가슴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은 엉뚱하게 다른 곳을 찾았다. 난 그의 시계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에 잡히는 대로 시계의 둥그런 유리 부분을, 그리고 쇠줄을 타고 내려가 호크를…. 호크를 어루만지는 내 손엔 자꾸만 호크의 튀어나온 부분이 걸리었다. 그것만 누르면 시계는 그의 손목에서 스르륵 풀려 내려갈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내가 그의 시계를 애무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다리와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그의 왼쪽 손목 언저리를 헤매며 내 손가락들은 시계의 호크, 그 부분을 누를 듯 말듯 뜸을 들였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벗어나 목을 훑을 때 나도 모르게 몸을 뒤틀며 그의 시계를 풀어버리고 말았다.


탁!


메마른 소리가 들리고 그는 애무를 멈추었다. 그는 내 목에 닿아있는 얼굴을 떼고 조용히 날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눈빛만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분노나 의심보다는, 뭐랄까 “역시나 그랬군”의 의미를 담은 표정이랄까. 그는 떨어진 시계를 주워 자기 손목에 차고는 아무 말 없이 길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그와는 연락되지 않았다. 그하고는 더 이상 마주칠 일도 없었지만, 이 일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충격과 함께 나의 첫 키스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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