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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버스 Oct 21. 2021

[대만] 택시 운전하는 사진 기사

세상 창의적인 가족사진을 찍게 된 사연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우리 가족은 일 년에 최소 한 번은 함께 해외여행을 갔다.

엄마가 워낙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출장으로 모은 항공 마일리지가 너무 많아서 온 가족이 퍼스트 혹은 비즈니스 클래스만 타고 다녀도 남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2017년 우리의 목적지는 대만이었다.

문제는 우리의 여행이 대만이 한창 더운 7월의 여름이었던 것.

민소매를 입고 다니다가 팔과 어깨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더운 나날이었다.

대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날씨가 그렇게 습하고 더울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가 미리 택시투어를 예약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대만 여행을 가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택시투어가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했다.

타이베이 곳곳을 돌아볼 수 있도록 택시+기사를 하루 종일 렌트해서 원하는 루틴대로 다니는 거였다.

택시 기사를 연결하는 플랫폼이나 여행업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네이버 카페나 블로그 후기를 보고 알음알음 예약을 하는 분위기였다.

나도 열심히 서칭을 하면서 가보고 싶은 관광지들을 골랐고, 그 관광지들을 모두 다녀오는 경우의 대략적인 견적도 파악을 했다.

문제는 어떤 택시기사를 선택하느냐 였다.

여자 여행객에게 약을 먹이고 택시기사가 나쁜 짓을 했다는 루머도 있었기 때문에 좋은 분을 만나고 싶었다.


블로그를 뒤지다가 '영어는 못하지만 사진은 기가 막히게 찍는' 택시기사에 대한 후기를 읽게 되었다.

당시 나의 최우선 선택 기준은 원활한 의사소통이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분으로만 추리고 있었는데 그 후기를 읽자마자 꽂혀버렸다.

삼각대나 셀카봉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도로 사진이 찍힌 블로그 후기를 보고, 이 분이다 싶어 J의 연락처를 받았다.

다른 택시기사 분들 중에는 한국인 고객을 하도 많이 받아서 아예 카카오톡 계정이 있는 분들도 있었는데, J와는 위챗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했다.

더듬더듬 루틴을 설명하고 비용을 합의한 뒤,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온천으로 유명한 시골 마을에서 1박을 하고 다시 타이베이로 돌아오는 날 J와의 택시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너무 이른 오전에 타이베이에 도착하는 바람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J에게 위챗 메시지를 보내서 내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바람에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스벅으로 바로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답장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J를 원래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만나서 같이 스타벅스로 오기로 하고, 엄마와 동생은 짐과 함께 스벅에 남아있었다.

엄마와 동생은 휴대폰 로밍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따로 연락을 할 수가 없어서 불안했지만 별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만나기로 한 장소에 J가 나타나지 않아 초조해하다가 혹시나 해서 스타벅스에 가봤는데, 이미 엄마와 동생이 J의 차에 타 있었다.

J가 따로 답장을 하지 않고 그 장소로 온거였다.

일부러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본인이 이해만하고 따로 답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정도로 J는 쑥쓰럼이 많고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는 여행 내내 최선을 다해 우리를 가이드해주었다.

모든 가족여행 사진 중에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여행 사진을 대만에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J 덕분이다.

엄마의 인생샷. 소품은 물론 J가 제공해주었다.


J는 다양한 소품들도 가지고 있었고, 전문 카메라로 우리를 한 명씩 열심히 찍어줬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직접 몸으로 시범을 보이면서 포즈까지 잡아줬다.

사진 찍히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는 계속 엉거주춤한 사진만 찍혔지만, 엄마와 동생은 제법 멋있는 사진을 많이 건질 수 있었다.

우리끼리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포즈와 장소에서 독창적인 사진을 남겼다.

원근법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사진, 손과 발을 모두 모아 한껏 친해 보이는 사진, 자연물을 이용해서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된 것 같은 사진 등등 J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제공했다.


혼신을 다해서 사진을 찍어준 J 덕분에, 한 장소에서 머무는 시간이 꽤나 길었다.

더군다나 차가 많이 막혀서 원래 가려고 했던 관광지중에 한 곳은 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우리는 많이 웃었고 열심히 모델이 되었다.


떠듬떠듬 소통을 하면서 이해한 바에 의하면, J는 원래 사진작가였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 않고 부족하다보니 택시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승객의 사진을 찍어준 것을 계기로 그때부터 "사진 찍는 택시기사"로 포지셔닝을 한 것이었다.

나는 J를 "택시 운전하는 사진사"로 표현을 고쳐주었는데, 그게 잘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과 같은 n잡러 시대에, J의 사이드잡이 더 흥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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